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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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5년 12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이 당명을 단순 변경해서 만들어진 보수정당이다. 실질적으로 민주자유당 법인은 1990년 1월 22일부터 1997년 11월 21일까지 7년 10개월간 존속했다.
보수정당 역사상 손꼽힐 만큼 개혁적이었으며, 대구/경북에서 가장 외면받았던 보수정당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문민정부가 PK만 편애하고 TK를 홀대한다는 불만과[3][4] 신한국당이 TK 출신이 대부분인 5공, 6공 시절의 군인 출신 정치인들을 숙청한다는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TK에서 자유민주연합과 무소속 후보들이 약진하는 돌풍이 일어나기도 했다.[5] 하지만 5공, 6공 출신의 인사들을 밀어낸 자리에 신세대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해서 당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이때 당선된 초, 재선의원들 중 상당수가 중량감 있는 정치인으로 자라나면서 보수정당이 정권을 빼앗아오는 데 성공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1997년을 전후로 해서 1996년 연말에 일어난 국회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차남 김현철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여파가 IMF 외환위기까지 이어지면서 문민정부와 신한국당의 이미지는 상당히 실추된다. 결정적으로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새롭게 총재직에 취임한 민선 초대 서울시장 출신 조순에 의해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
참고로 김영삼은 1997년 대선 직전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이후 쭉 무소속으로 지냈다. 후신 정당인 한나라당에는 한 번도 몸 담은 적이 없는데, 이미 정계은퇴를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또한 대선 과정에서 자신과 크게 갈등을 빚었던 이회창 때문에 입당하는 것이 껄끄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nkptel.or.kr'[6] , PC통신(신한국텔) 접속 명령어는 'go nkptel'이었다.
2. 상세[편집]
가장 짧게 존속했던 여당의 당명 가운데 하나로, 비슷한 예로는 열린우리당(3년 9개월), 대통합민주신당(6개월)이 있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사실 대통령이 입당한 적은 없어서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라고 하긴 어려우므로,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한 대통령 소속당명'이라 볼 수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다수파는 여전히 민주정의당 출신의 민정계였는데[7] , 김영삼은 김문수, 이재오 등 민중당 출신들을 영입하며 민주계의 세를 강화하는 한편,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은 민자당 내에서 서서히 외곽으로 밀려나다가 1995년 초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며 공화계 의원들과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탈당했다. 1995년 12월 김영삼은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노태우와 함께 만들었던 민주자유당의 간판을 내려버리고, 김영삼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에서 따온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로고 역시 교체했다. 또한 중도 노선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이는 당시 진보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도 취한 태도였다.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다.[8]
1996년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선전했음에도[9][10] 전두환, 노태우 구속의 역풍을 맞고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에서 자유민주연합과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 확보에 일단 실패했으나, 선거 후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와 과반수를 확보하였다.[11]
1996년 12월 크리스마스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직권상정) 파동[12] 과 1997년 외환 위기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7년 11월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된다.
15대 대선에서는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었다. 이 때 선출된 후보가 이회창. 당시 9명의 후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하여 9룡으로 불렸다. 마침 명사극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될 때라서, 이들을 다룬 만평 중 용의 눈물 버전으로 된 9룡 풍자도 꽤나 등장했었다.
3. 강령과 정책[편집]
강령
1. 우리는 인간의 존엄에 기초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정치개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맑고 깨끗한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정착∙발전시키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주민자치생활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자율과 협동, 창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민생안정을 기하며,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튼튼한 국민경제’를 달성한다.
3. 우리는 온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성장과 복지의 조화를 통해 건강한 복지사회를 건설하며 참여와 협력의 공동체적 노사관계를 정착시켜 산업평화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개혁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지속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며 미래를 이끌어 갈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고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달하여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5. 우리는 쾌적한 환경을 향유할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며 환경친화적인 자원절약형 사회를 지향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녹색사회를 실현한다.
6. 우리는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여 국가발전에 여성의 잠재능력을 적극 활용하고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이룩한다.
7. 우리는 민족이 공영과 공동발전을 적극 추진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이룩하며 자유적 안보체제를 확립하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침으로써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고 국제적 협력과 노력에 적극 참여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한다.
기본정책
21세기 새로운 정치 구현
1. 깨끗하고 도덕적인 정치문화 창출
2. 경쟁력 있는 생활정치 추구
3. 행정의 선진화와 사회안정 확립
4. 세계화와 지방화를 선도
5. 대통령중심제에 의한 국민통합의 화합정치 지향
6. 통일에 대비한 새로운 정치세대 육성
활력있고 정의로운 선진국민경제 건설
7. 국가경쟁력 강화
8. 경제정의 구현
9.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
10. 중소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발전
11. 농어민의 삶의 질을 향상
12. 주민생활의 안정과 질적 향상을 기함
13. 교통난을 완화
14. 정보화사회 촉진
15. 국토의 균형발전과 효율적 이용
16. 우주와 해양 개척
건강한 복지사회 실현
17. 사회보장제도를 확대∙발전
18. 노인 및 장애자복지 증진
19. 저소득층의 최저생활수준 보장
20. 공동체적인 노사관계 정착
21.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가 우대받는 사회 구현
22. 국민건강 증진과 건전한 여가생활 영유
지속적인 교육개혁과 새로운 민족문화 창달
23. 창의적인 인간교육 실천
24. 쾌적한 교육환경 조성
25. 민족문화 창달로 국민의 문화생활수준 향상
26. 청소년을 밝고 건강하게 키움
27. 사회공동체의식 확산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조성
28.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 회복
29. 맑고 안전한 물 공급
30. 폐기물 통합관리체계 강화
31. 환경보존과 경제발전의 조화 추구
32. 지구환경보존을 위한 국제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
여성참여 확대와 남녀평등사회 실현
33. 여성들의 정치 및 행정참여 확대
34. 성차별적 고용관행을 타파하여 여성근로자의 권익과 평등 보장
35. 양성평등 의식과 문화 정착
민족통일과 세계평화 실현
36. 남북한간의 상호신뢰 기반 구축
37. 민족공동체 구성과 조국통일 실현
38. 적극적 외교로 세계평화와 인류복지 증진에 기여
39. 강력한 국가안전보장체제 확립
40. 해외동포 권익보호를 강화하고 한민족 역량 결집
4. 상징[편집]
웹상에 돌아다니는 #또다른 로고 이미지도 있는데, 실제 사용된 로고와는 곡선이 사뭇 다르다.
5. 당가[편집]
후렴구만 바꾸었을 뿐 민자당 시절과 가사가 동일하다.
6. 역대 전당대회[편집]
자세한 내용은 신한국당/역대 전당대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역대 지도부[편집]
7.1. 총재[편집]
7.2. 대표위원[15][편집]
- 1대 : 김윤환 (1995.12.6 ~ 1996.5.6)
- 2대 : 이홍구 (1996.5.7 ~ 1997.3.12)
- 3대 : 이회창 (1997.3.13 ~ 1997.6.30)
- 대표위원 서리 : 이만섭 (1997.7.1 ~ 1997.7.20)
- 4대 : 이회창 (1997.7.21 ~ 1997.9.29)
- 5대 : 이한동 (1997.9.30 ~ 1997.11.21)
7.3. 원내총무[편집]
- 1대 : 서정화 (1995.12.6 ~ 1996.5.7)
- 2대 : 서청원 (1996.5.8 ~ 1997.3.14)
- 3대 : 박희태 (1997.3.15 ~ 1997.8.6)
- 4대 : 강재섭 (1997.8.7 ~ 1997.9.2)
- 5대 : 목요상 (1997.9.3 ~ 1997.11.21)
7.4. 사무총장[편집]
- 1대 : 강삼재 (1995.12.6 ~ 1997.3.14)
- 2대 : 박관용 (1997.3.15 ~ 1997.8.6)
- 3대 : 강삼재 (1997.8.7 ~ 1997.10.24)
- 4대 : 김태호 (1997.10.25 ~ 1997.11.21)
8. 출신 대통령[편집]
9. 역대 선거 결과[편집]
9.1. 국회의원 선거[편집]
9.2. 재보궐선거[편집]
10. 비판[편집]
-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신한국당 박찬종 전 의원[16] 은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망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등 지탄을 받았다.#
- 신한국당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환경을 헬조선으로 전락시켰다. 이들이 도입한 파견근로제도의 정착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과시간 근로를 조장할 수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또한 이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직권상정 했던 시기는 시장에 고용의 탄력성이라는 효과를 통해 부실기업들의 도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야당의 보이콧[17] 과 유력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후 야당과의 영수회담을 통해 사실상 달라진 게 없는 합의안이 국회에 통과되고 외국 투자자들은 이 기간 동안 한국정부의 리스크 관리 능력에 의문을 품으며 투자금을 빠르게 회수하기 시작했다.
- 신한국당은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을 추진하여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