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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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성경의 등장인물. 북왕국 예후 왕조의 초대 국왕이며, 성경 이외의 기록에도 나오는 엄연한 실존인물이다.[1]
2. 초기 생애[편집]
예후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로, 군 사령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9대 왕 여호람(요람)이었는데, 그는 아합[2] 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선지자 엘리사는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3] 아합 왕가를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후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예언자(엘리사)는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말씀을 전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야훼의 백성을 다스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다. 내가 이세벨의 손에 죽은 예언자들뿐 아니라 나의 모든 종들의 원수를 갚으리라. 그러니 너는 네가 섬기던 아합의 가문을 쳐부수어라. 내가 아합 가문에 속한 사내 녀석들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리라. 그리하면 아합의 온 가문이 망하리라. 나는 아합의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이나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처럼 만들리라. 이세벨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즈르엘에 있는 제 땅에 버려져 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젊은이는 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열왕기하 9:6~9:10(공동번역성서)
3. 역성혁명[편집]
예후는 그 명령에 따라 휘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여호람 왕을 활로 쏘아 죽인다.[4][5] 그 후 아합 왕조의 사위가 되어 악을 행한 남유다 왕 아하시야를 처단한다. 그리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죽이러 찾아갔다. 이세벨은 예후가 자기를 죽이러 찾아오는데 꽃단장을 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예후를 보자, 저주를 퍼붓는다.
예후가 문에 들어서자 소리쳤다. "상전을 죽인 역적 지므리 놈아, 그래 일이 잘 되었느냐?"[6]
열왕기하 9:31(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자신이 포섭한 내시들을 시켜 그녀를 창문 밖으로 던지게 하였고, 떨어져 죽은 시신의 위로 마차를 몰고 지나가 확인사살을 했다. 그래도 이전 왕족이었으니, 시신이라도 장례를 치러주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수습한 시신은 머리와 손, 발 외에는 모조리 곤죽이 된 것으로 모자라 엘리사의 예언대로 개들이 전부 뜯어먹은 뒤였다.(...) 왕위에 오른 예후는 아합 왕가의 왕족들을 숙청한 뒤,[7]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는 철저한 혁명을 전개한다.[8][9][10] 열왕기에 따르면, 예후는 그의 자손이 북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낼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후는 바알 신앙 대신에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 1세가 퍼뜨린 금송아지 숭배를 다시 회복하였고, 결국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이스라엘 영토가 아람에 의한 침공을 받는다. 예후는 죽은 후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즈가 11대 왕이 되었다.
3.1. 텔 단 비문[편집]
1993년에 발견된 '텔 단 비문'은 위에 나온 아람 왕 하사엘이 세운 비문으로, 이 비문에는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아하시야 왕을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예후의 쿠데타가 아람의 사주에 의한 반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텔 단 비문[11]
4. 국제외교[편집]
그런데 자기 손으로 오므리 왕가를 다 죽인 예후가 이 비문에서는 ‘오므리의 아들 예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게 눈여겨볼만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예후의 쿠데타와 상관 없이 '오므리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시리아에서는 이스라엘 왕실을 일컫는 말로 굳어져있었다는 것이다.[13] 두번째 설명은, '오므리의 아들'이라는 게 아시리아에서 예후의 정통성을 밀어주는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샬마네셀의 현무안 조각상에서는 이스라엘 바로 옆 아람 왕을 애비 없는 자 하자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쿠데타로 즉위한 두 왕 중 한쪽은 '오므리의 아들 예후'이고 한쪽은 '애비 없는 자 하자엘'이라면, 이건 아시리아쪽에서 봉신인 예후의 정통성을 밀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살만에세르 3세는 어째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 부르는가? 이에 관해서는 적어도 서로 상반되지 않은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몇몇 역사가는, '오므리 집안'이란 명칭이 아시리아의 외교적 언어표현법에서 '이스라엘 집안' 곧 북 왕국을 지배하는 왕가를 가리키는 통상적 명칭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언제나 북 왕국의 모든 임금에게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다른 임금들이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살만에세르 3세는 아합 임금을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후기에 이르러, 기원전 802년경에 아다드 니라리 3세(Adad-Nirari III)는 '사마리아인 여호아스'라고 말하고 있고, 기원전 738년경 티글랏 필에세르 3세(Tiglat Pileser III)도 이스라엘 임금 므나헴을 가리키는 데 똑같은 명칭('사마리아인')을 사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원전 732년에 같은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이스라엘 임금들에게 여전히 '오므리 집안'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오므리 왕가가 사라진 뒤 한 세기가 지난 이후에 여전히 이 명칭이 아시리아 임금들의 공식 문서에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른 학자들은 이와 다른, 좀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설명을 선호한다. 살만에세르 3세는 다마스쿠스 왕국과 그 나라의 임금이었던 하자엘을 기원전 841년경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임금 예후는 그의 전임자들이 걸어왔던 정치적 노선에서 벗어나 아시리아에 복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살만에세르 3세의 문서는 아마도 위의 두 임금, 곧 '반역자' 다마스쿠스의 하자엘과 '충실한' 이스라엘의 예후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 주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하자엘은 반역자 곧 '아비 없는 자식(비합법적인 왕)'으로 표현하고 이와 반대로 예후를 충실한 임금 곧 '오므리의 아들'로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아시리아인들의 입장에서 예후가 이스라엘 왕가(오므리의 나라)의 적법한 후계자로 간주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장-루이 스카Jean-Louis Ska, 《인간의 이야기에 깃든 하느님의 말씀》La parola di Dio nei racconti degli uomini, 박문수 번역, 성서와함께, 2016, pp.179-182
5. 평가[편집]
열왕기에서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바로잡고 옳은 일을 했다는 찬사를 적는 동시에 금송아지 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야훼의 율법도 따르지 않았다는 타락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전체적으로 예후 왕조가 예후 다음으로 4대를 이어나간 것은 바알 신앙을 따르던 오므리 왕조를 멸했기 때문이라며 그나마 역대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선 가장 나은 평을 남겼다.[14]
그러나 예후에게는 결정적인 실책이 있는데, 아합과 이제벨의 딸인 아달리야를 제거하지 못하고 다윗 왕가 대학살이 발생하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했다. 아달리야는 예후로 인해 아들 아하시야와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잃어 다윗 왕가를 숙청하는 여왕이 되었고, 북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적대 관계로 돌아서 버렸다.
외교적인 면에서 보자면, 비록 아합 시절 같은 화려한 패권과는 거리가 멀고 어떻게보면 아시리아에 다소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을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의 체급에서 아시리아와 맞서는 건 무리가 있고, 설령 아합 시절의 카르카르 전투처럼 일시적인 성공을 거둔다 한들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원교근공의 논리로 아시리아에 머리를 숙이고 아람을 견제하는 게 낫다. 결국 100여년 후 아시리아에게 북왕국이 멸망하긴 하지만, 100년 뒤 결과를 예후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너무 결과론적인 시선이다. 오히려 아시리아와 봉신 계약을 하면서도 야훼 신앙에선 내정 간섭을 안 당한 것에서 예후의 외교 감각을 엿볼 수 있다. 훗날의 유다인 역사가들 입장에서는, 對아시리아 동맹의 리더이면서 정작 종교에선 외국에 종속된 아합보다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머리 숙이고 야훼 신앙을 간직한 예후가 훨씬 좋게 보였을 것이다.
6. 이후[편집]
예후 사후 하자엘에 의해서 아람의 공격을 받아 많은 땅을 잃었고 이는 그의 손자인 요아스 대에야 수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