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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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이 중국 대륙(중원)을 통치한 시기를 말하며, 수도는 칸발리크(대도)였다.
원나라는 존속기간이 97년으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정도면 중원의 통일 왕조들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그 이유는 군사력만으로 세워진 나라여서 과거 로마 제국이나 중화권 국가들과는 달리 소프트 파워가 부족했고, 지배계급 상당수가 문맹이었으며[5] ,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통치에는 한계가 있었다.[6] 게다가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중세 흑사병까지 돌아서 결정타를 먹었다.[7] 또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흑사병에 의해 원나라의 인구가 급감한 것은 아니며, 이미 흑사병이 유행하기 전에 몽골군의 잔혹한 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인구가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치를 일삼는 몽골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 이에 따른 하층민들의 궁핍, 사회 체제의 모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는 현재도 후신을 자칭하는 민족이 독립국가를 유지하는 데다가[8]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와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9] 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의 중국을 몽골의 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중국은 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으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본인을 몽골 제국의 대칸이자 중화 황제라고 칭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쿠빌라이 칸이 추존한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거나 중화 황제인 것은 아니니, 현대 중국의 중국인이거나 중화 영웅이라는 주장의 설득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쿠빌라이 칸보다 더 일찍 칭기즈 칸을 자국의 군주로 추존한 나라도 없지 않다.
또한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도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라는 중국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10]
하지만 원나라 지배층이 한족화되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원나라 지배층은 계속 변발과 자신들의 관습 및 문화를 유지했다. 심지어 그들은 새로운 수도에 중국식 궁궐을 지었지만 이는 한족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원나라 황제들과 지배층들은 여전히 게르에서 생활했다.[11] 물론 원나라를 세운 후 몽골 지배층들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이는 한족화라기보다는 원래 물욕이 강했던 몽골인들의 습성이 정복을 통해 극대화되며 사치에 탐닉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유교, 도교 등 중국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접하기는 했지만 이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 정복 이후 접하게 된 티베트 라마교에 심취하는 등 중국 한족 문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해갔다. 애초에 유목민의 문화는 유교로 대표되는 정주민, 농경민의 문화와는 너무 달랐고 정반대라 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충, 효, 분수에 맞는 행동 등 유교의 질서는 그들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고, 막내 아들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말자 상속 전통이 있는 그들에게는 연장자를 우대하고 장남을 우대하며 명문에 따른 충성을 강요하는 유교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고,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몽골 제국의 제5대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12]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었고, 서역의 4대 칸국[13] 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14][15]대재건원 만물질시
(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
중세 몽골어로 예해 몽골 올로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었다. 황성은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이었다.
한족 왕조인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태풍과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했다. 잘 안 알려졌지만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졌다. 북원은 20여년간 명나라와 다투다가 겨우 3대[16] 에 이르러 쿠빌라이 황통의 천원제가 대칸위를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했다. 이때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북원은 이 20여 년간 이어진 원나라의 직접적인 연장선만 일컫기도 하고, 혹은 훗날 청나라가 몽골의 대칸위를 차지할 때까지 250여 년간 몽골 초원에 존재했던 모든 후계 정권을 통틀어 일컫기도 한다.[17]
한족을 정복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18]
종교는 티베트 불교였는데 라마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였고, 탄트라 좌도 밀교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였는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계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했고, 원나라가 사라지자 중국에서도 티베트 불교가 사라졌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몽골인과 티베트인이 중요한 대접을 받다 보니 다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가 활성화되었다. 다만 몽골 초원에 본격적으로 티베트 불교가 전파된 것은 원나라의 붕괴 이후인 알탄 칸 시기였다.
2. 역사[편집]
1259년 몽골 제국의 제4대 대칸인 헌종 몽케가 붕어하고 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다음 대칸위를 두고 툴루이 내전을 벌였다.
1260년 쿠빌라이가 스스로 대칸을 칭했고, 1264년 아리크부카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정식으로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 대규모 내전의 여파로 몽골 제국은 일 칸국, 우구데이 칸국[21] ,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과 같은 4칸국, 그리고 쿠빌라이의 원나라로 분열되어 버렸다.[22]
쿠빌라이 칸은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교체하고 원나라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1267년부터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276년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고 1279년에 벌어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의 잔당을 정리하면서 중원을 완전히 정복했다.
쿠빌라이 칸은 차남 칭김을 황태자로 임명했으나 칭김이 사망하면서 그의 3남인 테무르를 황태손으로 세웠고 1294년 쿠빌라이 칸의 뒤를 이어 테무르가 원나라 제2대 황제인 성종으로 즉위했다.
성종은 아들 테이슈를 황태자로 임명했지만 테이슈가 요절해버리고 1년 뒤인 1307년 성종도 붕어하면서 이후 원나라는 25년 동안 9명의 황제가 연달아 즉위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성종이 죽자 그의 황후였던 불루간이 성종의 사촌동생이었던 안서왕 아난다를 다음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이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지방에 가있었던 성종의 조카들인 카이산과 그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부추겼고, 수도 대도에 먼저 도착한 아유르바르와다가 블루간과 안서왕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황족들 대부분이 카이산을 지지했고, 그의 군사력도 막강했기에 결국 아유르바르와다가 형인 카이산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1307년 카이산이 원나라 제3대 황제인 무종으로 즉위했다. 무종은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제로 책봉하고, 자신이 붕어하면 제위를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4년 뒤 무종이 붕어하자 1311년 아유르바르와다가 원나라 제4대 황제인 인종으로 즉위했다.
인종은 제위를 이어받는 조건으로 자신이 죽으면 제위는 형 무종의 아들이 잇기로 약조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인종은 모후인 흥성태후 옹기라트 다기와 결탁하여 무종의 장남인 쿠살라와 차남 투그테무르를 추방하고, 자신의 아들이었던 시다발라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1320년 인종이 붕어하고, 시다발라가 원나라 제5대 황제인 영종(英宗)으로 즉위했다. 영종은 선제인 인종때부터 전횡을 일삼던 할머니 흥성태후와 그녀의 세력들을 숙청하고, 한화정책 추진으로 황권 강화에 힘썼으나(영종신정) 이에 대한 반발에 부딪혀 1323년 시해당하고 말았다.(남파의 변)
영종이 시해당하자 흥성태후의 일파 중 한 명이었던 테시가 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이며, 황태자 칭김의 장남 카말라의 아들이었던 이순테무르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니 그가 원나라 제6대 황제인 진종이었다.
1328년 진종이 갑작스럽게 붕어하자 장남인 라기바흐가 8세의 나이로 원나라 제7대 황제인 천순제가 되었는데 이를 두고 원 조정은 천순제를 지지하는 상도파와 제위를 무종(제3대)의 후손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킵차크 엘테무르를 주축으로 한 대도파로 나뉘게 되었다. 대도파는 무종의 차남인 투그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하니, 그가 1328년에 원나라 제8대 황제인 문종이 되었다.
상도파와 대도파 양대 세력은 전면전(양도전쟁)을 벌여 상도가 점령되었고, 천순제가 실종됨으로써 문종의 대도파가 승리하게 되었으나 문종의 형인 쿠살라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 위기감을 느낀 문종이 쿠살라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1329년 쿠살라가 원나라 제9대 황제인 명종으로 즉위했다. 명종은 부황인 무종처럼 자신이 죽으면 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준다고 약조했으며, 6개월 뒤 붕어하자(천력의 변) 문종이 복위하게 되었다.
1332년 문종이 붕어하면서 형인 명종의 아들로 하여금 대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엘테무르는 이를 무시하고 문종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후의 반발로 결국 명종의 차남인 6세의 린친발이 원나라 제10대 황제인 영종(寧宗)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영종이 2개월만에 붕어하면서 고려의 대청도로 유배를 가있었던 명종의 장남 토곤테무르가 1333년 원나라 제11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혜종으로 즉위했다.
혜종이 즉위하면서 황제가 연달아 교체되는 혼란기는 종식되었으나 이미 원나라는 권신들간의 권력 다툼, 홍건적과 같은 한족들의 대규모 반란, 흑사병의 창궐 등으로 점점 쇠락하고 있었다.
결국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홍건적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의 건국을 선언했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직후 대규모 북벌를 단행하여 원의 수도 대도를 함락시켰고, 혜종은 북쪽의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면서 북원을 건립했다.
북원은 중원을 되찾기 위해 명군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북원의 제3대 황제인 천원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조리그투 칸이 원나라의 황제위를 버리고 몽골 대칸의 지위만 잇기로 하면서 1388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해버리고 말았다.[24]
3. 사회[편집]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정복활동 초기에 몽골 제국은 한족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이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이 기록이 거짓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족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었다.[25]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했다.[26]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係官戶)와 투하호(投下戶)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게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었으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나라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외에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27] 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노예를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또한 원나라에는 인시(人市)라는 이름의 노예시장이 존재했는데, 여기서 노예들을 사고 팔 수 있었다. 원나라의 중급 관리는 100명 이상의 구구(노예)를 보유했고, 대사장(大使長, 노예주)의 구구는 왕왕 수천 수만명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총신인 아하마의 경우, 7,000여 명의 구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했으며,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으로,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28]
-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29] 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 민속학의 개척자인 주작인 같은 학자는 절강성의 규방 풍습을 논하면서 초야권과 연결짓기도 했다.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였다.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했다[30] .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그 재산은 주인 마음대로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었다.
-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계급별로 할당량을 정해두어 최하 계급인 남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32] .
- 《몽올아사기》(蒙兀兒史記)에서도 4등인제가 언급되고, 서방 수도사 오도릭의 글에도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적인 도구인 보갑제가 등장한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33] 또 원대 중기부터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유학적 지식보다 실무 행정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무 중시 경향은 원나라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신법 이후의 송나라에서도 그랬다.[34]
《진여록》(燼餘錄)에 의하면, '원나라가 개국한 뒤에 20가구를 ‘갑’으로 개편하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갑주’로 하였으며 의복, 음식을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였다. 동자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경록》에 의하면 '몽골인과 색목인의 포로 중 남자는 '노'라 하였고 여자는 '비'라 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구라 하였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에 의하면 원나라때 거의 모든 한인이 노예였고 외족(몽골/색목인 등)에 의한 한족 여성 수탈은 전 중국에 두루 퍼졌다고 한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의 책에서 초야권에 대한 글이 나온다.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하지만 홍익희 교수는 스페인어 전공자로 역사학자가 아니고 그이 주장은 신뢰성이 없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초야권이라는 법령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대칸들은 오히려 순결을 강력하게 장려했다고 한다. 당시 중원 지역에 온 몽골인은 겨우 30만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주로 군인인지라 편제 유지에 집중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지역으로 흩어진 몽골인들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1 #2
강남 지역에서는 남송대부터 터를 잡은 일부 지주층들이 원대에 그 기득권을 인정받아 자치를 행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은 관할 구역 내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몽골 정부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민을 농업 생산이나 산업 일꾼으로 부리는 한편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원말 한족 군웅으로 궐기하여 원나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의 영어권 권위자인 미카엘 딜런 교수에 의하면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족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수백만 명의 몽골인 남성들과 색목인 남성들을(Israeli, Raphael (2002). Islam in China.) 한족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 반대로 몽골인 여성들과 색목인 여성들 또한 한족 남성과 강제결혼을 당했다.
서울대학교 김호동 교수의 논문 《팍스 몽골리카와 중국》에 의하면 일본학자 후나다 요시유키(舩田善之)가 '색목인'이라는 명칭을 연구하면서 색목인이라는 명칭은 한족을 차별하기 위한 구분이 아닌 구별을 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나아가 4등인제에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동 교수는 이 설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러한 견해는 이제까지 색목인에 대한 이해가 몽골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민족 차별을 위해서 도입된 분류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인이나 남인에 비해 색목인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한족이 차별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원말,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명, 색목인 수백만 명, 한인 1,000만 명, 남인 6,000만 명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6,000만 명을 지배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제3계급인 한인을 활용했다. 고려인은 3계급에서 우대받은 편이라(처음부터 우대받은 건 아니었고, 고려가 부마국이 되고난 뒤 세월이 지날수록 지위가 나아졌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뽑는 과거제도(괴과-魁科)를 시행하기도 했고, 여기서 장원급제한 전원발[35] 같은 경우는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이곡, 최해 같은 이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인 관리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 외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지역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 확정이었다. 몽골 제국을 고평가하는 학자들은 "처녀가 금화 자루를 갖고 홀로 카라코룸에서 사라이까지 여행해도 아무 일이 없었다.'라는 기록만 갖고 몽골의 치안이 좋았다고 주장하나, 이 기록은 몽골 제국 측에서 기록한 것이고 역참들이 지키고 있는 대로에만 해당한 것이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몽골인 쪽이 밀리는데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 원나라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36]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으니 일반화는 다소 위험하다.
한편 유복형은 고려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
4. 행정[편집]
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명,청 제외) 중 가장 영토가 넓었지만 행정력이 가장 취약했다. 그야말로 군현제를 1,000년 전 봉건제로, 근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중세 봉건제도로 되돌린 수준이었다. 사실 이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지방 행정 제도는 중서성이 승상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37] ,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38] 에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 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나라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가 되어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었어도 통치는 사실상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징세, 징병, 행정력 행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힘들어 중앙집권보다 봉건제에 가까웠다.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자치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의 영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 도만호부,[39]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 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 만호부[40] 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 행정 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 가 죄다 군벌화되었다.
황실 직할군은 시위 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었다. 여기에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특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다.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만 행정이 미비했다고 하더라도 정보 연결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강남의 한족 부호층은 천자만 열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감히 열고 여기에 서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몽골 지배층은 이걸 그냥 일종의 유치한 코스프레쯤으로 인식했기에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가주는 대범함도 있었다. 걍퍅한 훗날의 청나라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이런 과감한 관용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보는 엉뚱한 시각도 있으나, 청 말[41] 과는 달리 원말 때는 유학적 사고로 무장하여 원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도 생각보다 많았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42] 이렇게 원나라에 충성한 한족들 중 살아서 몽골족과 함께 몽골 초원으로 도망친 이들은 몽골족에 동화되어 현대 몽골인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5. 문화[편집]
근본적으로 몽골 지상주의였으나 청나라처럼 한족의 문화를 탄압하지 않았기에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 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과 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서만 강제했다는 말이 있으나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한족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다.[44]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했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나라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은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 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45]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과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소소하지만 휴지 문화 또한 원나라 때에 생겼다. 원나라 이전에는 일을 본 뒤 얇게 가공한 나무 조각으로 닦았다고 하며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 통치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또한 원은 훗날의 명, 청과는 달리 기록 문화 자체에 관심이 적었기에 적어도 문자옥 같은 무시무시한 일은 자행한 바 없었다.[46]
6. 황실[편집]
6.1. 역대 황제[편집]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원나라 이전의 황제에 대한 내용은 몽골 제국 문서
의 역대 황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초대 세조의 재위기간은 원나라 선포 이전 몽골 제국 시절과, 마지막 혜종은 북원 시기에 걸쳐 있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7년(1271-1368) 중 첫 번째 쿠빌라이(25년)와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를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막장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26년간 8명에 1대에 3년.
6.2. 계보도[편집]
6.3. 추존 황제[편집]
7. 미디어에서[편집]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이 나올 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거나, 전성기인 쿠빌라이 칸 시대에 활발한 해외원정에 딸려서 언급되거나, 말기에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상황이 나오거나 셋 중 하나다. 대한민국의 경우 대몽항쟁기의 사건이 사극 등에 자주 나온다.
- 김용의 문학작품인《의천도룡기》에서 원나라의 말기의 주원장을 비롯한 대대적인 한족들의 대몽 항쟁이 그려진다. 이를 진압하려는 원나라 측 인물로는 히로인 조민과 그녀의 아버지 차칸테무르 등이 등장한다.
8. 여담[편집]
- 원나라의 법전 중 하나인 지정조격 유일본이 대한민국에서 발견되었다.[52] 그것도 라면 상자 안에서.세계 유일 몽골 최후의 법전 '라면박스'서 찾았다 몽골 전 대통령이 이를 보기 위해 친히 한국을 직접 방한했을 정도.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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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도는 겨울 수도, 상도는 여름 수도로서 기능했다.[2] Taagepera, Rein (1997),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 (3): 499, #[3] 탐라총관부[4] 동녕부,쌍성총관부[5] 원나라 황제들이 문맹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쿠빌라이 칸 때까지만 그랬고, 그 이후부터는 원나라도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적어도 황제들은 모두 한문에 능했다. 문종 같은 경우는 스스로 한시를 지을 정도로 문인이었다.[6] 같은 이민족 통일 왕조인 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황제들이 한화되기 시작하면서 만주족 황제부터 만주족 관료들까지 전부 소프트파워가 생기게 되었고, 268년 동안 지속되었다. 단, 청나라 역시 말기까지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 금지, 한족의 만주 이주 금지, 한족의 고위직 진출 금지, 한족 여자의 황후 책봉 금지 등 어떤 면에서는 원나라보다 더한 면도 있었다.[7] 원나라보다 단명한 세 왕조는 존속기간이 고작 10~30여 년 수준으로 급이 다르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무주나 왕망의 신나라는 너무 단명해서 아예 왕조로 쳐주지도 않는다.[8]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 내몽골은 중국, 부랴티아는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이다.[9] 물론 후대의 정복왕조인 청나라에 비해서는 한족들을 노예 취급하면서도 대단히 자유방임적이고 관대한 편이었다. 그들의 문화와 의식을 존중해주고, 한족들이 치르던 과거 시험 의례를 마치 현대의 코스프레 의식으로 보듯 몽골족들은 즐겨보면서 좋아했다. 그만큼 타민족의 문화에도 관심이 많으면서 관대한 나라가 원나라였다. 정확히 말하면 한족에 대한 취급이 대중에 의해서 과장된 것이 있다.[10] 사실 내몽골인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 아무리 내몽골인이 중국 내에서 (심지어 내몽골 자치구 안에서도) 다수 민족이 아니라고 한들,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 인구가 민족 불문 외몽골 전체 인구보다 많다. 외몽골 단독으로 몽골 제국의 계승자가 되면 그 외몽골을 압도하는 내몽골 몽골족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된다. 게다가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인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11] 원나라 황제의 경우 궁성에 게르를 설치하고, 거기서 살았다.[12] 비슷한 이유로 북위를 세운 선비 탁발부도 한화 개혁을 추진할 때 황족의 성을 원씨로 선택했다.[13]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14]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몽골 제국을 아우르는 대칸이었지, 실질적으로는 제2대 오고타이 칸의 붕어 이후 몽골 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분열되어 사실상 독립되거나 분열되어 떨어져나갔고, 각자 멸망하는 시기도 다르다. 킵차크 칸국은 현대 러시아의 전신이 되는 모스크바 공국에게, 일 칸국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다가 국력을 소진하여 내부 분열로 멸망했고, 티무르 제국에게 흡수되었으며, 차가타이 칸국은 이슬람 세력과 몽골족의 기득권 간의 대립으로 혼란이 발생한 와중에 티무르 제국에게 역시 흡수, 멸망당했다. 원나라도 명나라에 의해 북방으로 축출되었는데, 북원 때문에 몽골 제국의 멸망을 청나라의 만주족 황제들이 대원전국옥새를 가져간 17세기로 보긴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봐야 한다.[15] 그래도 원나라 우위의 몽골 제국 연대는 유지되었다. 각 칸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지배층 간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원나라 황제의 통행증만 있으면 명목상 몽골 제국 영역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16] 북원의 제1대는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였던 혜종 토곤 테무르이므로, 원나라가 쭉 이어진 것이라 간주하면 제13대였다.[17] 권용철(2021), <원대 말기~北元의 重臣 카라장(哈剌章) 小考>, 《史叢》 104.[18] 다만 의외로 원명교체기때 원나라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한인 사족들도 굉장히 많았다. 중앙의 조정이 몽골인과 색목인 위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사실 원나라의 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향촌 자치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다. 즉, 자신들에게 바칠 것을 바치면 향촌 세력가들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향촌을 어찌 다스리든지 방관하는 자유방임적인 통치체제였던 것이다. 즉 향촌의 사족들이 사실상 동네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막북의 초원으로 후퇴한 시점에서도 끝까지 따라가서 충절을 지킨 한인 관료들이 많았고, 원나라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족들이 많았다.[19] 다만 그것보다는 의외로 몽골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든 사람들에겐 대우를 해줘서 그렇다. 그래서 뭔가를 받은 사람들은 의외로 충성했다.
【《고려사》 <세가>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