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 미사

덤프버전 :

라틴어 : Missa solemnis
영어 : Solemn mass

1. 가톨릭의 전례인 미사의 한 양식
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엄미사
2.1. 개요
2.2. 작곡 배경과 과정
2.3. 초연과 출판
2.4. 곡의 작법과 성격
2.5. 곡의 구성
2.6. 평가


1. 가톨릭의 전례인 미사의 한 양식[편집]


High Mass

사제복사부제를 대동하고 향, 행렬용 십자가와 초를 사용해 성대하게 거행하는 미사를 일컫는다.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차부제도 대동한다. 보통 주님 부활 대축일이나 주님 성탄 대축일 같은 대축일이면 웬만한 본당에서 거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교급 성직자가 거행하면 특별히 주교 장엄미사(Missa solemnis pontifical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미사 항목 참조.

또는 이 미사를 수행하기 위해 작곡된 미사곡을 장엄미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엄 미사를 위한 그레고리오 성가도 있으며 상당히 많은 작곡가들이 장엄 미사를 남겼고 심지어 현재에도 작곡되고 있다. 하이든의 장엄 미사 C장조 하지만 오늘날 음악 팬들은 장엄 미사라고 하면 곧바로 다음 항목의 작품을 떠올릴 것이다.


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엄미사[편집]





2.1. 개요[편집]


정식 명칭은 장엄 미사 D장조(Missa solemnis in D-dur) Op. 12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ethoven.jpg
베토벤, 요제프 칼 슈틸러作,1820년 / 손에 든 악보가 장엄 미사(Missa solemnis)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2번째 미사이자 마지막 종교 음악 작품. 흔히 이 곡과 교향곡 제9번,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디아벨리 변주곡 4곡을 베토벤의 후기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작품으로 보는데, 그만큼 이 장엄 미사는 종교 음악 분야에서 손꼽히는 명작이며 베토벤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작품이다.[1] 전술한 바와 같이 장엄 미사는 원래 고유명사가 아닌 데다 같은 제목으로 작곡된 미사곡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장엄 미사'라고 하면 그냥 이 곡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 정도.

베토벤 후기의 대작들이 다 그렇듯이 이 장엄 미사도 음악적으로 매우 난해하고 연주자에게는 극악의 난이도를 선사하는 난곡으로 악명이 높다. 미사곡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전례나 교파의 영성에 얽매이지 않는 종교적 감성과 유례없는 교향악적 시도에 대해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다.

2.2. 작곡 배경과 과정[편집]


베토벤은 1807년에 하이든이 오랫동안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미사 C장조를 작곡해 준 적이 있었지만, 이 곡은 초연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뭔가 2% 부족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그 뒤로 베토벤은 종교 음악을 한동안 쓰지 않았는데, 생애 후반기에 가서 다시 미사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들 중에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2]의 황제 가문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자였던 루돌프 대공이 있었다. 비록 선천적인 간질병 때문에 군인의 꿈을 접고 성직의 길을 걸었으나 황족이라는 신분과 추기경이라는 가톨릭 고위 성직자로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또한 엄청난 음악 애호가이자 열렬한 베토벤 팬이었다.[3] 그는 베토벤을 경제적으로 후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당국에 찍혀 있던 베토벤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4] 베토벤 역시 루돌프 대공의 호의에 대한 감사로 여러 작품을 그에게 헌정하였으며 이 장엄 미사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다.

이처럼 베토벤과 각별한 사이였던 루돌프 대공이 1819년에 올뮈츠[5]의 대주교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미 전년도에 이 소식을 들은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취임식의 미사에서 연주할 목표로 이 미사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느린 작곡 진척도 때문에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마감 시간을 놓친 이 구상은 장장 5년에 걸쳐 거대한 대작으로 변모했다. 이왕 작곡을 시작한 김에 이벤트용 작품이 아니라 자신만의 의도와 철학에 의거한 대작을 창작하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장엄 미사는 9번 교향곡과 거의 병행해서 작곡했는데, 두 곡 모두 그 동안 이 분야에서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구성과 장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작곡 속도는 대단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 두 대작을 창작할 당시 베토벤은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한창 작곡 중에 약속이나 연락 없이 찾아오면 시중들던 하녀든 절친한 친구든 귀족 나으리든 간에 무조건 욕설을 퍼부으며 내쫓아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굳이 베토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작곡을 마치고 쉴 때까지 무작정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베토벤은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한동안 빈을 떠나 뫼들링이라는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때 고용된 하녀들이 베토벤의 극에 달한 괴팍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모두 1달도 되기 전에 그만뒀으며 심지어 밤중에 몰래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작곡할 때 문을 걸어 잠근 채 큰 소리로 소절을 불러재꼈으며 악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늦은 시간에도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뫼들링 사람들은 이 위대한 거장을 모신 혜택(?)을 톡톡히 받았을 것 같다.[6]

2.3. 초연과 출판[편집]


19세기의 베토벤 연구가 노테봄(Martin Gustav Nottebohm, 1817∼1882)이 쓴 베토벤 전기에 따르면 1820년경에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가 이미 완성되었고, 2년 후인 1822년에 상투스/베네딕투스와 아뉴스 데이가 마저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완성된 후에도 1년여에 걸쳐 계속 수정과 개작을 거듭한 끝에 1823년에 최종 완성본을 탈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초연은 1년 뒤에 이루어졌고 실질적인 전곡 초연은 베토벤 사후인 1830년에야 이루어졌다.

이 작품의 최초의 완성된 악보 사본이 1823년 3월 19일에 루돌프 대공에게 전달되었고 1년 뒤인 1824년 4월 7일에 러시아 공작 니콜라이 갈치니(Nikolai Borisovich Galitzine)의[7] 차르 황실 방문 기념식을 위해 러시아 제국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곡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다만 이 초연은 대중이 아니라 고관대작들을 위한 연주였으며 미사곡이 아니라 오라토리오로 소개되었는데, 베토벤은 이 장르 파괴 소식을 듣고도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이 작품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초연된 지 1달 뒤인 5월 7일로, 합창 교향곡의 초연 무대에서 1부 연주곡으로 이 장엄 미사 가운데 자비송과 신앙 고백, 하느님의 어린양 세 개 악장을 발췌해 공연하였다. 이런 발췌 공연은 일종의 고육책이었는데, 당시 미사곡은 대중 음악회에서 그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검열 당국의 규정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프로그램을 보면 이들 발췌 악장은 '독창과 합창이 수반된 세 곡의 대규모 찬송가'라고 개명되어 인쇄되어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을 여러 음악 출판사에 중복 계약해 인세 수입을 몇 배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의외로 어느 출판사도 이 계약을 반기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오랜 지인들과도 사이가 틀어지는 등 인간관계 면에서 심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결국 이 장엄 미사는 베토벤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고 그가 사망한 지 1달이 지난 1827년 4월에서야 비로소 비인의 쇼트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토벤이 이 곡을 '오직 가톨릭 전례를 위해'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자신이 교섭한 출판사들 중 짐로크 출판사에는 라틴어로 된 미사 통상문에 의거한 원본 외에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를 사용한 판본을 출판해도 된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8] 당시 가톨릭교회들에서는 오직 라틴어로만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어판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모국어로 예배를 집전하는 개신교 종단에도 이 곡의 사용을 허락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일화는 전례에 얽매이지 않는 베토벤의 신앙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4. 곡의 작법과 성격[편집]


베토벤 자신이 일기나 편지 등에 남긴 작곡 경과를 보더라도, 그 자신도 이 곡을 쓰면서 여러 면에서 고심하고 때로는 갈팡질팡한 것을 알 수 있다. 작곡 초기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당대 전례 음악까지 모든 성가의 전례문과 운율, 음악적인 기법을 연구할 것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팔레스트리나조스캥 데 프레, 기욤 뒤파이, 요하네스 오케겜 등 중세 시대의 성가나 미사곡 악보까지 뒤져가며 작곡에 응용하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옛 음악에 대한 탐구는 대영광송의 후반부 푸가나 신앙 고백의 중간부에 나오는 그레고리오 성가풍 가창과 후반부 푸가 등에서 훌륭하게 응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토벤이 옛 음악의 굴레에만 얽매여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위법 기교만 하더라도 만약 16세기나 18세기에 대위법 선생한테 숙제로 제출하면 최하점을 받을 만큼 이곳저곳에서 규칙을 무시하고 있지만, 이런 규칙 파괴는 실력이 모자라서가 절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 그는 대위법 자체에 곡을 매몰시키기보다는 대위법을 하나의 음악적 재료로 활용해서 철저하게 음악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위법 문법의 파괴는 오히려 베토벤 자신이 설계한 음악을 구현하는데 훨씬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이와 같은 대위법의 파격성을 가지고 이 작품의 음악성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

한편 이 작품은 대위법에서만 파격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관현악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장엄 미사는 역대 미사 작품에 비해 관현악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아서 거의 성악에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베토벤 이전에도 종교 음악 장르에서 기악의 비중을 강화시킨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상 단일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통상 미사인 기욤 드 마쇼의 '노트르담 미사'에서도 오르간 간주가 도입된 전례가 있으며,[9] 17세기의 프랑스의 작곡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악기를 위한 미사(Messe pour les instruments au lieu des orgues)라는 대담한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다.[10] 하지만 장엄 미사처럼 기악 파트가 단순히 반주나 간주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서 교향악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경우는 당연히 없다. 때문에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연구가인 파울 베커(Paul Bekker, 1882∼1937) 같은 사람은 이 곡을 미사곡이 아니라 미사 형식을 차용한 교향곡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곡에서는 관현악이 단순히 성악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일각에서 9번 교향곡의 쌍둥이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는 나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베토벤이 이 미사를 오로지 기악적 관점에서 작곡했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며, 단지 성악 위주로 작곡된 기존의 미사들에 비해 교향악의 비중을 상당히 높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 이 작품에서는 베토벤 특유의 범종교적인 종교관을 발견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베토벤은 태어난 직후 가톨릭 유아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고, 죽기 직전에도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장례식도 가톨릭 의례에 맞춰 치러졌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종교 음악을 썼던 다른 작곡가들, 예를 들면 바흐브루크너와 같은 독실한 신앙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종교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가끔 감정이 격해지면 '그저 예수십자가에 매달린 유대인일 뿐'이라는 신성 모독성 발언까지 했으며 이 때문에 베토벤은 당시 비밀경찰의 사찰 대상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11]

베토벤이 자신의 종교관을 직접적으로 밝힌 자료는 없어서 베토벤의 신앙심에 대한 해석은 전문가마다 가지각색으로 내리고 있지만, 베토벤은 당대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도 이와 연관시켜 생각했던 것은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도 신화에 심취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가 범신론자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 곡에서 오랫동안 서구 사회와 사상을 지배해 온 영성과 신성이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과학과 이성에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하던 과도기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는 음악 사회학자들의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베토벤은 이 장엄 미사가 가톨릭 전례문을 토대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 종파나 전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신과 소통하기 위한 곡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파울 베커는 이 작품에 대해 '장엄 미사는 특정 종파의 예배 의식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빠져 있다. 베토벤은 특정한 종교적 범주에 속박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와 세속 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렸다'라고 분석했으며 다수의 종교 음악 전문가들도 이 장엄 미사는 통상적인 전례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이 미사곡은 미사라는 형식만 빌렸을 뿐 헨델의 메시아처럼 종파에 구애받지 아니한 범종교성을 갖춘 작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품이 세속 교향곡이나 성악곡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베토벤 스스로도 이 곡이 '청중들에게 종교적인 감정을 일깨우고 또 영원히 하도록 작곡되었다'고 주장했으며, 후대 음악학자들도 이 곡이 특정 종파에서 주장하는 '영성'을 담고 있지는 않더라도 보편적인 종교 음악으로서의 특성과 가치를 분명히 갖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 곡이 특정 전례를 위해 작곡된 것은 아닐지라도 전례 음악으로서의 효용이 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실제로 이 작품은 지금까지 많은 종교적 전례에서 연주되어 왔다.


2.5. 곡의 구성[편집]


일단 예나 지금이나 대개 엄격하게 지켜오고 있는 다섯 개 섹션으로 구성되는데, 물론 종교 음악인 탓에 가톨릭 전례 형식을 준수하는 대목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꽤 많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모든 대목의 규모가 대폭 확대돼서 전곡 연주 시간이 80~90분에 육박하는 대작이 되었다.[12]

악기 편성은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콘트라바순/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팀파니/오르간/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성악진은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혹은 베이스바리톤) 독창과 혼성 4부 합창(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으로 구성된다.

1곡은 자비송(Kyrie)이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가 양 가에 놓이고 중간부에서는 단조로 조옮김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이 오는 ABA' 아치형 3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미사곡 자비송 대목에서 지켜오던 고전적인 규칙이지만, 전체 연주 시간이 10분 이상이라 단지 한 줄의 가사로 구성한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규모가 커졌다.

2곡은 대영광송(Gloria)으로,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으로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는 다소 금욕적이고 장중한 자비송과 대비를 이루도록 트럼펫과 팀파니 등을 앞세워 빠르고 화려하게 진행된다. 중간중간 미사 원문에 맞추어 경건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첫머리가 기본 주제마냥 계속 모습을 조금씩 바꿔가며 등장한다.

이어 중간부로 볼 수 있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대목으로 들어간다. 대부분의 미사곡에서처럼 베토벤도 이 부분의 템포를 느리게 잡고 단조로 조옮김해 진행시키고 있다. 자비를 갈구하는 이 대목이 끝나면 팀파니의 트레몰로와 함께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Tu solus Dominus, Tu solus Altissimus, Jesu Christe)'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섹션에 들어간다.

이 부분의 후반부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in gloria Dei Patris)'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복잡하고 정교한 푸가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변주곡 등에서 보여진 바 있는 푸가빠의 면모가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베토벤이 존경했던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영향도 느껴진다. 특히 메시아 중 맨 마지막 곡(Worthy is the Lamb)의 아멘 푸가와 비교해서 들어보자.[13]

3곡은 신앙 고백(Credo)이며, 여타 라틴어 미사곡들처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생략 없이 그대로 쓰기 때문에 대영광송과 함께 텍스트 분량이 많은 대목이다. 다만 베토벤은 이 모든 텍스트를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선배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파격이었다. 음악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은데,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에서는 선법(도리아)을 사용하고 나지막하게 낭창하는 기법을 사용해 상당히 예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인류의 창조나 예수의 고난과 처형, 나흘 만에 부활하고 승천하는 모습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각각 장조와 단조, 그리고 다시 장조로 복귀해 가사의 의미에 음악을 최대한 맞춰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만년에 집착했던 대위법 기술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다음에 오는 대목에서 베토벤은 제대로 뒤통수를 치는데, 첫머리 선율이 다시 돌아오면서 '크레도'가 각 합창 파트에서 주고받으며 반복되는 가운데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부분을 다른 파트들에서 빨리 읊어버리듯 지나치게 하고 있다. 이 부분은 실제 공연이나 녹음에서도 크레도를 소리 높여 부르는 파트에 가려 잘 들리지 않는데, 베토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복잡한 긍정과 부정의 자기 견해를 의도적으로 내비친 것으로 여겨져 키배논쟁 떡밥으로도 사용된다.

이렇게 구체적인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을 후다닥 끝내버린 뒤에는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Et vitam venturi saeculi. Amen.)' 부분에 맞추어 두 번째로 거대한 푸가 대목이 나온다. 대영광송 후반부의 푸가와 마찬가지로 이 대목도 단순히 바로크 식의 푸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형식과 발전을 지니고 생장하는 베토벤만의 푸가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4곡은 거룩하시도다(Sanctus)로, 흔히 다른 미사곡에서처럼 '높은 데서 호산나!(Hosanna in excelsis)'를 경계로 두 섹션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Sanctus, Sanctus, Sanctus. Dominus Deus Sabaoth)'을 조용한 관현악의 연주 위에서 독창자들이 아주 나지막하고 여리게 부르고, 이어 '하늘과 땅에 가득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 Hosanna in excelsis)'를 합창이 전 관현악의 성대한 연주를 곁들여 빠르고 화려하게 부른다.

이 대목이 마무리되면 다시 첫머리의 경건한 분위기를 살린 관현악 간주 부분이 이어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14]를 합창과 독창자들이 서정적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바이올린 독주가 곁들여지기 때문에, 청자들은 마치 바이올린 협주곡 혹은 바이올린 독주를 동반한 합창곡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흔히 앞에서 나온 텍스트라서 앞의 음악을 그대로 반복하는 마지막 구절인 '높은 데서 호산나!'도 이 미사에서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 아예 새롭게 작곡하고 있다.

마지막 5곡은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으로, 제3곡 신앙 고백 못지않게 음악과 텍스트의 규칙 파괴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Agnus Dei, Qui to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가 반복되는 첫머리는 단조 조성으로 작곡되고 전체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일관해 '대영광송'의 중간부에서 보여준 자비를 갈구하는 신자들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분위기는 중간부에서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라는 전례문 마지막 텍스트가 합창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하면서 밝고 전원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하지만 이 대목은 갑자기 팀파니와 트럼펫의 기상나팔 스타일 연주가 멀리서 들려오듯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중단되는데, 독창자들이 다소 긴장된 낭창조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번갈아 부르면서 갑자기 텐션이 높아진다. 특히 테너 독창자는 '자비를,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대단히 절박하게 노래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악상 대비는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반복되는데, 결국 마지막에서는 '평화를 주소서'의 대목이 주도권을 얻어 밝은 분위기를 회복하며 끝맺는다. 하지만 최후반부에 가서도 팀파니가 간간이 연주하는 솔로가 '과연 평화가 주어질까?' 하는 식의 의문점과 불길함을 계속 남기고 있다.

신앙 고백 후반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보통 이전 텍스트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깨져 있고, 게다가 극적으로 등장하는 타악기와 금관 악기, 전 관현악의 강한 행진곡 리듬은 '평화를 주소서'라는 바로 앞의 텍스트와는 완전 상반된 전쟁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어서[15], 종교적인 미사곡에 세속 음악의 구성 원리를 도입한 것으로 여겨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교향곡 9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미사곡의 가창 난이도는 극악이다. 대영광송과 신앙 고백 후반부의 푸가는 특히 심한데, 전자는 헨델풍의 빠른 대선율 처리가 특히 힘들고 후자는 한술 더 떠 베이스 파트에서 엄청나게 길게 끄는 음[16]이 등장하는 등 웬만한 범인들은 이해 못 할 목소리 처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브람스독일 레퀴엠과 함께 최상급 합창단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곡으로 손꼽히는데, 물론 독창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창 대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합창의 비중이 좀 더 높은 편이다.

2.6. 평가[편집]


음악적으로는 교향곡 9번에 맞먹는 최고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갖고 있다. 바그너는 장엄 미사에 대해 "베토벤의 정신이 담긴 순수한 교향곡적 작품"이라 했다[17].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작품 중 한 곡이지만 거장이 5년이나 걸려서 쓴 작품답게 그 긴 연주 시간 동안 1초의 시간도 섣불리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을 갖고 있다.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이 곡과 관련해서 현재까지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곳곳에서 보여지는 전통과 당대 어법의 혼용, 미사 전례문에 대한 도전적인 재해석이나 자의적인 비중 변경 등은 20세기 이후에도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 비평가나 음악학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파고들어 갈 부분이 많은 어렵고 복잡한 작품이다.

한편으로 장엄 미사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일반적인 기독교 종단의 예배에 쓰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연주 난이도도 높다 못해 극한을[18] 추구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전문 연주자들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기 힘든 것이 현실. 실제로 이 곡의 연주는 대부분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하우스 등 '세속적인' 공연장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만약 종교 시설에서 연주한다고 해도 예배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는 경우는 전무하고 반드시 특별한 공연의 형태로 연주된다.

이 장엄 미사는 선배 작곡가 바흐의 미사 b단조와 규모와 음악성 면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자주 비교가 되기도 한다.[19] 신 다음으로 베토벤을 존경했다는 푸르트벵글러는 친구와 길을 걷다 바흐의 미사 b단조와 베토벤의 장엄 미사 중 어느 곡이 더 훌륭한가 의견을 나누었는데, 친구가 바흐의 작품이 보다 간결하고 종교적 본질에 충실하다는 뜻을 피력하며 손을 들어주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겠는걸."이라 말하며 홱 토라지는(...) 모습이었다고. 그 외 브루크너의 미사곡을 격찬하며 이에 견줄 작품은 베토벤의 장엄 미사와 바흐의 미사 b단조뿐이라고 평하는 당대 평론가도 있었을 정도로 이미 이전부터 바흐와 베토벤의 두 미사 작품은 그 완성도와 깊이 덕분에 자주 비견되곤 했으며 단순히 미사곡의 준거 기준을 넘어 서양 음악 사상 최고봉에 위치한 작품들이라 평가받았다.

다만 푸르트벵글러의 친구가 말했듯이 b단조 미사가 좀 더 종교적 영성에 충실한 작품이라면 이 장엄 미사는 종교적 감동보다는 전통의 재해석과 새로운 음악 수법에 대한 실험에 주안점을 둔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다.[20] 그래서 전례 없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수법이 난무하고 있으며 고래의 수많은 명작 미사들을 참고했으면서도 이들과는 매우 다른 작품을 만들어냈다. 한마디로 온고이지신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

한편 저렇게 베토벤의 장엄 미사를 최고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정작 장엄 미사 녹음을 전혀 남기지 않았는데 젊은 시절에는 몇 차례 연주한 듯하나 이후로는 좀체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음악을 구현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장엄 미사의 연주 난이도가 얼마나 극악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도 장엄 미사의 결정반은 찾을 수 없고 실연에서도 완벽한 연주를 성사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훌륭한 연주를 보여준 공연이나 음반은 꽤 있지만 이들도 다들 한두 가지 이상의 약점을 갖고 있는데, 이 곡이 합창단과 4명의 독창자 및 교향악단(오르간 포함)[21] 모두에게 1급의 기량과 더불어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합창 교향곡은 성악 파트가 마지막 악장 중반부터 등장하는 반면, 이 장엄 미사는 성악 파트가 90분 내내 별로 쉴 시간 없이 계속 소리를 질러야 한다(...). 따라서 완벽한 연주보다는 연주자가 제대로 된 연주를 위해 분투하는 과정[22] 자체에 의의가 있고 또 그런 의도로 작곡되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이다.

[1] 연주 시간으로만 따지면 2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오페라 피델리오가 장엄 미사보다 더 길지만 이 경우는 오페라라는 장르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2] 이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은 이름만 남은 허울뿐인 껍데기에 불과했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국에서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보헤미아 왕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뿐이었다. 대신 신성 로마 제국 외부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에르데이 대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같은 동유럽 영지나 밀라노 공국 같은 이탈리아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유럽의 열강 국가였다.[3] 아마추어 작곡가이기도 했다. 디아벨리 변주곡 곡명의 주인공인 악보 출판업자 디아벨리가 독일에서 잘 알려진 50명의 음악가를 모아 변주곡 모음집을 만들려고 했을 때 루돌프 대공도 그 명단에 있었다.[4] 베토벤은 정치적/종교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해서 자주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독일 귀족들이 악당 중의 악당으로 싫어하는 나폴레옹을 한때나마 찬양했던 것이 대표적.[5]체코 올로모우츠[6] 그래도 뫼들링은 이후에 베토벤의 후기 명작들이 탄생한 곳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현재 뫼들링에는 베토벤 기념관이 있으며 베토벤과 관련된 관광 상품으로 꽤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관광객들이 이 시골 마을을 찾는 유일한 이유도 바로 베토벤과 뮈들링의 인연 때문. 이게 다 당시 주민들이 괴짜 대작곡가의 기행을 잘 참고 견뎌준(?) 덕분일 것이다.[7] 갈치니공은 당시 또 한 명의 베토벤의 후원자였다.[8] 다만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결국 출판 계약 자체는 성사되지 못했다.[9] 다만 오르간 간주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며 오늘날 연주에서는 이 간주가 생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통상 미사에 대해서는 마쇼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10] 제목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오르간 대신 악기를 위한 미사'이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악기를 위한 미사는 오늘날 관점에서도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 작품인데, 예상하다시피 당대에는 불경한 작품이라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11] 다만 사찰 대상이 된 이유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자주 했던 탓이 더 크다.[12] 존 엘리엇 가디너처럼 정격 연주를 고수하는 지휘자들은 베토벤 특유의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 지시를 존중해서 70분대 초반에 연주를 완료하기도 한다.[13] 주제와 첫 부분 진행이 어쩐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쏟아지는 금관과 팀파니의 어마어마한 음량 공세는 그런 느낌을 그새 잊도록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14] 이 미사뿐 아니라, 상당수 미사들의 음반들에서는 '거룩하시도다'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 부분을 아예 '베네딕투스(Benedictus)'로 독립시켜 한 트랙으로 나누곤 한다. 물론 미사 전례문에는 그러한 분리가 없다.[15] 가디너의 실황 연주 영상에서는 한술 더 뜬 편집을 보여준다. 해당 파트들이 연주될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교회의 모습, 그리고 불타는 교회의 모습을 오버랩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16] 쉽게 구할 수 있는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의 베토벤 구전집 총보 151~152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Et vitam의 tam을 무려 여섯 마디 반이나 쭉 끌고 있는데, 셈여림도 스포르찬도(sf)라서 작게 부를 수도 없다! 어지간한 폐활량을 가진 가수가 아니라면 숨이 턱에 받혀 주저앉는 대목. 베토벤의 S속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사실 합창 파트라 돌려쉬면 된다[17] 이는 파르지팔에서 1막 다수를 성배 예식에 할애한 바그너의 안목 있는 평가다. 실제로 바그너 자신도 파르지팔의 미사 음악을 작곡할 때 베토벤처럼 중세는 물론 루터교회의 미사 음악을 많이 참조했다.[18] 당시 일각에서는 베토벤의 귓병과 연관하여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 목소리의 한계를 넘어서 마치 기악처럼 성악 작곡을 했다는 주장을 했다.[19] 다만 규모 면에서는 몰라도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훌륭한 미사들이 상당히 많다. 미사는 중세 시대부터 현재까지 계속 창작되고 있는 음악 장르라는 것을 상기하자.[20] 장엄 미사에서는 가사 전달보다 음악적 효과를 더 중요시한 듯한 부분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앞서 곡의 구성 파트에 서술한 크레도의 가사 처리 수법이 대표적인 예.[21] 하나 더 덧붙이자면 베네딕투스에서 바이올린 솔로를 맡는 콘서트마스터의 독주 역량까지. 이 부분만을 까다롭게 평가하는 애호가도 많다.[22] 반농담이지만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 대목에서 '자비를 베푸소서' 간구하는 알토 독창자의 뺨이 붉어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안쓰럽게 지켜보자면 단번에 텍스트의 의미와 함께 인간의 무력함과 절박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3 20:12:57에 나무위키 장엄 미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