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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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광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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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포스트시즌
1995 플레이오프 MVP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6 KBO 리그 다승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6 KBO 리그 탈삼진왕

보유 기록
최연소 세이브
만 18세 1개월 14일[1]
최연소 승리
만 18세 1개월 18일[2]
최연소 완투
만 18세 1개월 18일[3]
최연소 완봉승
만 18세 3개월 7일[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8번
김종석
(1993)

주형광
(1994~2006)


장원준
(2008~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7번
조정훈
(2005~2006)

주형광
(2007)


조정훈
(2008-201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6번
강병철
(2006~2007)

주형광
(2009~2019)


한지운
(202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번


주형광
(2024~)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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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94528_m.png

롯데 자이언츠 No.
주형광
朱炯光 | Joo Hyung-Kwang

출생
1976년 3월 1일[1] (48세)
부산광역시 수영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부산중앙초 - 초량중 - 부산고
신체
185cm, 92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4~2007)
지도자
치바 롯데 마린즈 연수코치 (2008)
롯데 자이언츠 재활군 코치 (2009)
롯데 자이언츠 1군 불펜코치 (2010~2011)[2]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1~2012)[3]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3)
롯데 자이언츠 1군 불펜코치 (2014)[4]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4)[5]
롯데 자이언츠 3군 투수코치 (2015)[6]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5~2016)[7]
롯데 자이언츠 3군 투수코치 (2016~2017)[8]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8)[9]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8~2019)[10]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9)[11]
고려대학교 야구부 투수 인스트럭터 (2020)
부산양정초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1~2023)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24~)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의병 제대[12]
본관
신안 주씨
종교
불교
1. 개요
3. 지도자 경력
4. 피칭 스타일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1990년대 중후반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로서 롯데의 역대 에이스 계보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좌완 에이스이자[13] 1990년대 롯데의 명승부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투수이며[14] 걸출한 좌완 투수가 많이 없는 롯데 팬들에게는 아직도 안타깝게 단명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3월 1일생이지만, 1년 일찍 학교를 다닌 덕에 투수 부문의 최연소 기록들을 대부분 그가 보유하고 있다. 최연소 승리, 최연소 완투승[15], 최연소 완봉승, 최연소 세이브 등등.

현역 시절 첫 해부터 13시즌동안 등번호 28번을 달았는데 현역 마지막 해였던 2007년에는 부산고 후배 좌완 투수 장원준에게 28번을 물려줬다. 그리고 본인은 37번을 달고 마지막 시즌을 뛰었다.[16]


2. 선수 경력[편집]




3. 지도자 경력[편집]


일본으로 건너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받고 귀국한 그는 롯데 자이언츠의 재활코치를 담당하다가 2011년에 롯데의 감독진과 코치진이 전부 물갈이되면서 투수코치가 되었다.[17] 초기에는 일단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들었는데, 부상 이후 재활 훈련에 매진하지 않았고 선수 말년에 미니홈피 관리에 매진하며 상당히 게을렀던 데다 코치 선임도 겨우 9개월 연수를 받고 바로 시행된 것이라 믿음직한 인상이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주형광과 가득염이 투수코치로 부임한 후 롯데 투수진이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평가가 나아지고 있는 편. 주형광이 투수코치를 맡게 된 이후로 불펜은 투수 영입 등을 감안하더라도 정상 수준을 넘어 리그 탑급이 되었으며, 특히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는 포시 한정 원수같았던 두산을 불펜의 힘으로 꺾자 팬덤 내에서 지지여론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2012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정민태 때문에 2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되자, 팬들이 난리쳤을 정도.

게다가 그렇게 할 수 없이 2군으로 밀려나 처음 맞이하게 된 첫 시즌인 2013년에는 남부리그 팀자책 1위를 만드는 등, 뚜렷한 성과를 하나 둘 계속해서 만들어 내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18]

근데 희한한 것은 주형광 코치의 성과,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취재해 놓은 기사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선 '도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능력은 확실히 있는 코치'의 이미지이다.

김시진 2년차부터는 1군 불펜 투수코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21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육성군으로 내려간 정민태의 후임으로 1군 메인 투수코치가 되었다. 2014 시즌 후 이종운이 감독이 되자, 다시 육성군으로 내려갔다. 새 1군 투코인 염종석이 철밥통 소리를 듣는 반면 주형광의 능력이 좋은 편이라 팬들의 반발이 어느 정도 있는 편.

결국 전반기를 마치고 1군으로 다시 올라왔다. 염종석은 육성군행.
그리고 주형광이 1군으로 합류하자 마자 귀신같이 선발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9월에는 팀 ERA가 2점대, 특히 불펜 ERA가 1점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9월 22일에 드디어 그의 업적을 다룬 기사가 났다. 요약하면 이종운과는 달리 경기 상황과 이닝마다 올릴 투수를 세분화 시킨 덕이라고 한다.

2016년에는 외야수 출신 감독인 조원우감독에게 투수교체 권한을 일임받았는데... 어째 전과는 다르게 좌우놀이와 한박자 어긋나는 투수교체, 김성배, 정대현같은 퇴물 투수들을 필승조로 쓰는등,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고 있다. 더군다나 5월 27~29일에 한화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더욱 장종훈 타격코치와 더불어 대차게 까이고 있다. 그냥 3연패도 아니고, 02롯데 수준의 한화에게 진게 컸다. 이닝을 쪼개며 하는 좌우놀이에, 툭하면 투수진 출석체크 등 다방면에서 롯데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당장에 선발에서 체력부담으로 내려왔다고 한 박진형을 3연투를 포함 왕창 부려먹는 모습을 보이며 언행불일치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크게 지는 상황이나 이기는 상황에서 투수진을 이닝을 나눠가며 쓰는 장면은 정말.. 심지어, 이명우좌타자 상대 원포인트 투수로 기용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8월 16일 고척 넥센과의 경기에서는 선발이었던 조쉬 린드블럼이 5이닝 동안 111개의 많은 투구수를 기록하고, 3실점(2자책점)을 기록하고 올라온 투수는 홍성민 그 이후에는 이명우-이정민-김성재[19] 미칠듯한 좌우놀이를 보여줬고, 이 투수들 중에 실점을 하지 않은 투수는 이명우였다. 특히 8회말에 김성재가 데뷔 첫번째 등판을 치르고 있을 때, 서건창에게 어려운 승부를 하며 카운트가 몰리는 상황이 왔을 때 덕아웃을 잡아준 장면에서 한숨을 쉬었다. 많이 갑갑하다는 의미에서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데뷔 첫번째 등판이었고, 3명의 타자에게 삼진 2개와 볼넷 1개를 허용했을뿐 나쁜 투구를 하지는 않고 있는 중이었다. 김하성에게 홈런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8월 17일 고척 넥센과의 경기에서 선발이었던 박진형이 4⅓이닝 6실점으로 강판당한 이후 올라온 투수는 홍성민[20] 그 이후 고질적인 문제인 이닝 쪼개기와 좌우놀이를 시전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팀은 7실점 이후 더 이상 실점을 하지는 않았지만, 김유영-박시영-이정민을 등판시켰다.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등판시키는 모습을 보면, 패전조-승리조라는 구별은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지고 있다.[21]

조원우에게 투수쪽을 일임받은 이후, 정말 갈피를 못잡고 엉망진창의 투수기용을 보이고 있다. 작년에 염종석이 있을 땐 주형광을 찾게 됐었는데, 오히려 1군을 제대로 맡기고 보니, 더하면 더했지 덜한 모습은 아닌거 같다. 특히 정민태 코치와 김시진 감독이 미친듯이 하던 좌우놀이를 자기가 하고 있으니 더더욱. 차라리 크리스 옥스프링 2군 투수코치나, 현재 3군에 있는 진필중 코치를 올려서 하는 게 현재 투수를 기용하는 장면보다 훨씬 나은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더더구나 한 번 굴리기 시작한 투수인 홍성민이나 다른 젊은 좌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던질때 경기마저 던질 기세인 이명우를 아직도 기용하는 모습은 왜인지 아직도 의문부호가 붙는다.[22]

그리고 8월 18일 자로 드림팀(3군)으로 내려갔다! 그 대신 올라온 코치가 크리스 옥스프링 2군 투수코치이다. 현재 2군 코치인 크리스 옥스프링, 진필중과 협력하여 젊은 투수들을 키워내고, 부진한 1군 투수들을 고쳐서 다시 올려보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후 2018년 7월 21일 김원형 코치에게 1군 투수코치를 넘겨받고 1군에 콜업되었다. 김원형은 수석코치만 담당한다. 그리고 8월 달 들어 갑자기 롯데가 정상적인 투수교체 타이밍을 보여주고 팀도 성적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주형광 코치의 평가는 2016년 전 형광매직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9월 30일 수원 원정경기에서는 5회말 박세웅이 제구난조로 볼질을 하자 교체하려고 조석두에게 물어보았지만 거절당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투수교체 권한은 온전히 석두의 권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보기).

양상문 감독이 부임한 19시즌에도 메인 투수코치로 남게되었으나 양상문 감독 스타일상 투수교체는 직접 관여하는게 유력해서 투수 코칭에만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2019년 7월 23일 양상문이 사퇴하고 공필성 대행이 취임하자 2군으로 내려갔다. 새 1군 메인 투코는 임경완.

이후 2019년 10월 7일 성민규 단장 체제하에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한 해 휴식 후[23] 2021년에 부산 양정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4 시즌을 앞두고 5년만에 1군 메인 투수코치로 롯데로 복귀했다. 롯데 코치 1기 시절 때 공과가 너무 명확해서 팬들은 복귀에 호불호가 갈리고 있으나 그래도 김태형 감독의 추천으로 복귀한거라 일단 믿어보자는 여론이다.

4. 피칭 스타일[편집]


파일:주형광 투구폼.gif
주형광의 투구폼
공이 느린 파워피처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포심 패스트볼슬라이더 두 구종만을 주로 던지는 투피치 투수였으며,[24] 특히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는데 포심과 슬라이더의 구속차가 크지 않았고, 우타자를 상대한 프론트도어 슬라이더가 절묘했다.

다만 공이 가벼워서 피홈런이 많다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충분히 메우고 남을만한 칼날같은 제구력과 날카로운 볼끝을 자랑했는데, 만화에나 나올법한 3분할 투구를 했던 투수였다. 덕분에 삼진을 굉장히 잘 잡아내는 타입. 신인 첫 해부터 7년차까지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했을 때 늘 탈삼진 부문 순위권에 있었으며 특히 1996년에는 221개의 탈삼진으로 현재까지도 아리엘 미란다의 225개, 안우진의 224개, 최동원의 223개에 이은 단일시즌 탈삼진 4위 기록을 보유중이다.

전성기 시절 같이 경쟁했던 특급 좌완인 LG의 이상훈이나 한화의 구대성에 비해 위압감은 떨어졌지만, 영리한 투구스타일로 하나하나 타자를 돌려세웠던 굉장히 실리적인 타입의 투구를 했다. 그래서 아마 시절부터 붙어있던 별명도 '꾀돌이'였을 정도.[25]


5. 여담[편집]


  • 프로 입단 전까지 부산 토박이였던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윤성환이 가장 좋아했던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다고 한다.[26]

  • 기억에 제일 남는 시즌은 1995 시즌이라고 한다. 팀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인기도 많았으며[27] 부산과 서울을 오가면서[28] 큰 대회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코치 시절 제일 기억에 남았던 선수는 박진형이라고 한다.

  • 머리가 아주 크다. 선수 시절부터 컸던 것으로 유명했지만, 은퇴 후 살이 붙으며 더 크게 보인다. 펠릭스 호세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호세보다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을 무시할 정도. 선수시절부터 대두로 유명했던 장성호는 유튜브 '야구라'에 출연해서 자기보다 머리 큰 사람으로 양준혁과 주형광을 꼽았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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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생일은 3월 1일생이지만 음력 생일인 1976년 2월 1일로 호적에 오르는 바람에 빠른 생일로 19세인 1994년에 프로에 입단했다. 그 해 해태에 입단한 이호준도 이런 케이스이다.[2] ~5월 1일[3] 5월 2일~[4] ~8월 20일[5] 8월 21일~[6] ~7월 16일[7] 2015년 7월 17일~2016년 8월 17일[8] 8월 18일~[9] ~7월 20일[10] 2018년 7월 21일~2019년 7월 22일[11] 7월 23일~[12] 1996년 11월 현역으로 입대했지만 내장 기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1997년 2월 의병 제대했다.[13] 롯데의 역대 에이스 계보를 살펴보면 최동원,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 문동환, 손민한, 송승준 등 유독 우완 투수들만 많았다. 주형광 외에 에이스로 꼽혔던 좌완 투수는 장원준 1명 뿐이다.[14] 1995년 플레이오프 6차전 1피안타 완봉승,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마지막 3타자 연속삼진 등등. 사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주형광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제일 잘막은 게 저 플레이오프 7차전.[15] 첫 승리가 완투승이었다.[16] 장원준이 롯데를 떠난 이후에는 김원중, 고원준, 김유영, 정대현, 안태경, 지시완, 21년도엔 신인 손성빈이 사용하였고, 현재 2023년 기준으로 해당 등번호는 외인 좌완 반즈가 쓰고 있다.[17] 로이스터 감독이 잘리면서 박영태, 양상문, 한문연같은 무능한 코치들이 이 때 다 잘렸다.[18] 뭐 진지하게 따지자면 2군 방어율은 큰 의미는 없다. 삼성같은 구단이 매년 1군감 투수가 한두명이라도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2군에서도 팀 방어율이 좋기 때문은 아니다.[19] 데뷔 첫번째 등판이었다. 데뷔전이었다는 이야기.[20] 이 근래에 홍성민이 계속 2번째 내지 3번째 투수로 올라와서 많이 구르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이종운에 의해서 부상에서 돌아온 이후 릴리스 포인트도 높히면서 부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작년만큼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작년에 비해서 더 안 좋은 상태인 것 같아 보인다.[21] 윤길현 - 손승락이 7~8월들어 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승리조라고 하더라도 크게 믿음이 안 가는 부분이 있는것만은 사실이다.[22] 결국 이명우는 8월 17일자로 2군으로 내려갔다.[23] 2020년에 고려대 코치로 있었다고 하지만 정식 등록은 되지 않았다.[24] 커브포크같은 종방향 변화구가 없었다. 그런데도 탈삼진 개수가 무시무시하다.[25] 프로 초창기 때는 아직 20살도 안된 시기라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남아있어 '딸기'라는 별명도 있었다.[26] 윤성환부산상고 재학 시절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의 주형광을 직관으로 보며 '저렇게 멋진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입단한 팀은 그 해 맞붙은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라는 것....[27] 1995년 롯데는 118만명의 홈 관중을 사직 야구장마산 야구장에 동원하며 구단 역사상 3번째로 단일 시즌 100만 관중 동원 기록을 세웠다. 1995년은 그야말로 1990년대 한국프로야구 인기의 마지막 황금기였는데 롯데 뿐만 아니라 LG와 OB의 홈 관중 합계가 220만명에 육박할 정도였고 삼성도 대구에서 62만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인기몰이에 한몫을 했다. 당시 삼성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9904명인데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관중석이 1만석을 겨우 넘었던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흥행 성과다. 이후 IMF와 박찬호로 시작된 MLB 붐, 2002 한일 월드컵 4강으로 인한 축구 붐으로 인하여 야구의 인기는 한풀 꺾였다가 2006년 WBC 4강,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 등의 성과를 연이어 올리며 축구와 MLB에 빼앗겼던 인기를 다시 회복했다.(특히 2000년대 중반에 들어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의 부진으로 인한 MLB 인기 감소와 축구의 인기가 국가대표, 해외파에 한정되었다는 것도 야구의 인기 회복에 한 몫을 했다.)[28] 1995년 포스트시즌은 서울과 부산에서만 열렸다. 서울팀인 OB와 LG가 1~2위를 하고 부산팀인 롯데가 3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해태도 4위를 했으나 3-4위팀 간 승차가 3.5경기 이상이면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거르고 플레이오프를 7전 4선승제로 치를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서 해태는 4위를 했음에도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그 해 롯데는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승 2패를 기록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한국시리즈에서 OB에 3승 4패로 밀려 준우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