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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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공식명칭
통일민주당 (統一民主黨 / Reunification Democratic Party)
약칭
민주당
창당일
1987년 5월 1일 (신한민주당에서 분당)
해산일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 3당 합당)
선행조직

파일: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이민우 구상에 반대해서 분당)
이념
중도개혁주의
온건보수주의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만리재로 15 (공덕동)
총재
김영삼 / 8선 (3·5-10·13대)
원내총무
이기택 / 6선 (7-10·12·13대)
사무총장
김동영 / 4선 (9·10·12·13대)
정책위의장
김동규 / 재선 (12·13대)
의석 수
55석 / 299석 3당 합당 직전
당 색

남색 (#211B7D)


빨간색 (#E60026)

당기
파일:통일민주당 로고.svg

1. 개요
2. 역사
2.1. 창당과 분열
2.2. 위기와 3당 합당
3. 지지층
4. 정당 로고
5. 역대 당직자
5.1. 총재
5.2. 원내총무
6. 역대 선거결과
7.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통일민주당/tongilmin2.jpg


진행 순서
1987년: 신한민주당 창당과 통일민주당의 탈당, 창당[2][3]
1
1984년 12월 20일: 창당발기인대회(민주화추진협의회와 구신민당(1967년) 최고위원연합)
2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 창당
3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 구상" 발표
3
신한민주당(1987년)
김대중, 김영삼 지지의원 포함 73명 분당 선언(1987년)
4
통일민주당 창당(1987년 4월)

1987년 창당되어 1990년까지 존속했던 정당. 3김체제의 주축 정당 중 하나였다.

신한민주당의 다수파인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가 1987년 4월 선도탈당해 창당한 정당이다. 그러나 8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갈등으로 같은 해 10월 말 김대중동교동계가 탈당하면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상도동계와 일부 비주류가 남게 된다.[4] 그해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패배하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제2야당(제3당)이 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신민주공화당당을 합쳐서대한민국의 보수정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의 전신인 평화민주당과 아래에서 언급할 꼬마 민주당 모두 이 통일민주당에서 갈라져나온 걸 감안하면,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모두의 전신이라고 봐도[5] 무방한 정당이기도 하다.[6]

주로 불린 약칭은 "민주당"이었다. 군부독재 시대 이래 약칭으로 민주당을 사용한 첫 번째 정당이다.


2. 역사[편집]



2.1. 창당과 분열[편집]


이민우 구상에 반대한 김영삼김대중의 "빅딜"로 1987년 4월 창당되었다.[7]

창당 당시 전주파 보스 용팔이정치깡패들의[8] 테러로 온갖 동정표를 잔뜩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고, 전두환 정권에 대대적으로 반발하며 6월 항쟁을 주도하여 결국 6.29 선언이 나오게 하는 기염을 토하였지만...

진행 순서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과 분열
1
통일민주당 창당(1987년 5월)
2
김영삼통일민주당 상도동계(1987년 10월 29일)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동교동계 탈당(1987년 10월 29일)
3
김영삼통일민주당(1987년 11월 12일)
김대중평화민주당 창당(1987년 11월 12일)

애초에 쌍두마차 파벌 체제로 움직이던 정당이라 대통령 후보를 놓고 단일화에 실패해 동교동계가 탈당해서 평화민주당을 만드는 바람에 상도동계만이 남게 된다.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9],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진을 면하지 못하여 제 2야당으로 전락했다.[10][11] 게다가 대통령 선거 직후 한겨레민주당으로 일부 양김이 아닌 세력들이 탈당했다. 하지만 한겨레민주당은 폭망.[12]


파일:attachment/통일민주당/tongilmin.jpg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장에서 당기를 흔드는 김영삼 당시 총재.

이후 평민당, 신민주공화당과 연합해 노태우 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견제를 효과적으로 선보여 당시 리더십이 부족했던 노태우에게 '물태우'란 별명을 안겨주기까지 했었다. 도리어 초기에는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평민당보다 강경했던 측면도 있었다고.


2.2. 위기와 3당 합당[편집]


강원도 동해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후보 매수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서석재 사무총장이 위기에 놓이면서 김영삼의 차기 대선 자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진행 순서
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1
민주정의당(1981년)
김영삼통일민주당 상도동계(1988년)
신민주공화당(1987년)
2
민주자유당 탄생(1990년)

이때 노태우가 김종필을 먼저 끌어들인 상황에서 김영삼에게 보수대연합을 제안했고, 김영삼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을 했다. 당시는 민주세력이 뭉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재야를 중심으로 "김영삼이 민주화를 뒤로 한 채 군부와 야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한 김영삼의 답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1990년 2월 9일,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창당

물론 3당 합당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결국 야합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니 군부세력에 빌붙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폄하하지만, 당내 소수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하나회를 완전히 뿌리뽑아버리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사실상 주도한 점은 긍정적이다.

파일:/pds/200803/04/71/c0002071_47cc15e112eda.jpg[13]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4836416680_887d4051d6_b.jpg
파일:/pds/200803/04/71/c0002071_47cc15de811a3.jpg
파일:external/img.segye.com/20090524001254_0.jpg

무효입니다!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노무현[14]


3당 합당 발표 직후에는 통일민주당 당원 거의 전부가 반발했다. 심지어 상도동계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최형우조차 공개적으로 "나는 안 간다"라면서 합당 거부를 선언했을 정도. 이를 보면 협상이 진짜 극비리에 이루어지기는 한 모양이다.[15] 그러나 김영삼이 직접 1:1 설득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김영삼의 간곡한 설득에 최형우가 결국 마음을 바꾸었고 시간이 갈수록 김영삼의 설득에 넘어가는 인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더니 결국 통일민주당의 거의 절대 다수가 합당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합당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등이다.[16] 이들은 무소속 이철, 박찬종 의원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했다.[17]

통일민주당은 이인제의 첫 정당이기도 한데[18], 그는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문민정부 출범 후 노동부 장관, 경기도지사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3. 지지층[편집]


1987년 대선 후 한국갤럽이 조사한 예상 득표율 자료를 인용한 분석 기사에 따르면 20~30대와 대학생, 화이트 칼라 및 고소득층의 지지율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19] 지역구도로 봤을 때는, 양김 분열 후에 김영삼상도동계가 주축이 된만큼 PK 지역, 즉 부산광역시경상남도가 주요 지지 기반이었다. 부산이 한때 야도(野都)였다는 말은 민자당에 흡수된 3당 합당 전까지[20][21]라고 보면 된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곳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23]을 올렸으며 다음 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산에서는 금정구, 단 1석을 제외[24]하고 싹쓸이 했는데 당시 부산, 경남에 출마한 인물들로는 김영삼을 비롯하여 노무현, 김광일, 서석재, 최형우, 신상우, 이기택, 황낙주, 김덕룡, 강삼재, 김동영 등 당의 간판급 인물들이었다. 경상남도 중에서도 대도시인 진주 그리고 김영삼의 고향인 거제군 정도가 대표적인 지역 기반이었다. 공업, 산업 도시에 젊은 층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향도 있던 셈. 다만 서부 경남지역(특히 대구와 가까워 대구권이라고 불리는 창녕군, 합천군 등)은 민정당 우세 지역들도 많았고, 군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의 덕을 봤던 울산도 민정당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25], 강동구[26]중산층 거주 지역도 우세지역이었다. 강남3구, 강동구 일부와 당시 새로 개발된 목동, 과천시 등 대규모 아파트 주거 지역이 거의 김영삼 우세 지역이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서울특별시 대부분 지역에서는 김대중, 경기도에서는 노태우가 앞섰으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평화민주당 바람이 불었지만[27], 강남권에서만큼은 김영삼과 통일민주당 지지세가 타 지역에 비해 더 높았다. 이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중산층 이상 계층 및 고학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28][29] 이러한 지역들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으로 재편되고 나중에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강세 지역이 되었다.[30] 이렇게 강남3구 및 영남지역의 통일민주당 지지층은 결과적으로 보수화가 진행되며 전체 보수진영의 지지층이 되었고,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상당기간 동안 1940년대와 50년대생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60%대를 넘나들게 하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31] 그나마 이 즈음에 청년층과 외지인의 영향으로 어느정도 보수세가 희석되었을 뿐이지, 이들 세대에서의 보수 강세는 2020년대 현재도 유효하다.

다만 3당 합당이 이뤄지기 전에도 김영삼의 지지층은 보수 쪽에 훨씬 더 가까운 편이었다. 비록 노태우와 김영삼은 각각 군부정권의 후신과 민주화운동가로서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자이고, 양측의 지지층 또한 이념적 동질성이 크다는 것이 사실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투표자 조사를 실시한 한국갤럽의 대표 박무익 소장은 "여론조사를 해보니 우리 사회에 보수온건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두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65%쯤 될 것인데, 이것은 노태우 김영삼의 공동표밭이기도 하다. 그동안 역대 정권이 이룩한 경제성장의 영향을 양김씨는 과소평가한 것 같다. 김영삼 씨는 너무 군정종식론에만 치중했고 집권능력을 확신시켜 주는 데 실패했다."라고 분석했다. #

즉 김영삼 지지층은 노태우 지지층과 함께 보수온건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김대중의 지지층과는 상당히 이념적으로 괴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김영삼의 지지층이 김대중의 지지층과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뭉치기는 했었지만, 이념적으로 분류했을 때는 물과 기름같은 관계이고, 오히려 노태우의 지지층과 화학적 결합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실현되었다.

단, 그렇다고 통일민주당 지지층이 죄다 민주자유당-신한국당 한나라당 지지로 환원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야권분열과 투표율 저조로 대승을 거두웠음에도 득표율이 40%에 그쳤고, 꼬마민주당이 14%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이는 1992년 총선, 1992년 대선, 1995년 지방선거, 1996년 총선에 까지 일관적으로 이어진다. 또한 1990년대 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상세히 보면 이 당시의 20대와 30대에서 민자당과 신한국당의 지지율이 일괄적으로 낮은 흐름을 보였는데 이를 통해 알수있는 점은 3당 합당 이전에는 야당 대표로 김영삼을 지지했던 수도권의 통일민주당 지지층들 가운데 상당수가 3당 합당에 대한 실망감으로 DJ계 민주당이나 아니면 꼬마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통합민주당(1995년)으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점이고, 이는 강남 3구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32]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90년 민정당과 민주당의 합당은 전통적인 보수 정당과 온건 보수 정당의 연합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김영삼의 지지층에는 분명 급진 개혁 세력도 존재하였으나 대체로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당과 김영삼씨의 연합은 넓은 의미에서의 보수 블록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두 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이었던 영남 지역에서의 지지층 확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4. 정당 로고[편집]


파일:통일민주당 심볼.svg

정당 로고 색깔은 하얀색으로 태극기와 같은 하얀 바탕을 거울삼아 나라와 국민에 힘써 이바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심벌마크는 남색 원 안에 하얀 한반도를 본딴 무늬를 새겨넣었다. '백의민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설도 있고, 한민족이 민주주의로 하나되는 정당을 표방한다는 일설도 있고, 민주정의당전두환의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어린 세상으로 가자는 뜻에서 하얀색을 정했다는 일설도 있다. 방송사 선거방송 때도 하얀색으로 나왔던 적이 있다.

당의 색깔이 빨간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고정된 색깔은 아니었으며, 이런 얘기는 주로 평민당의 노란색과 대비되는 1987년 대선 시절 때 나온 소리로 보인다.

파일:통일민주당 창당 초기 당기.png
참고로 막 창당했을 무렵의 당기는 이렇게 생겼었다. 1987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 참조

5. 역대 당직자[편집]



5.1. 총재[편집]


파일:통일민주당 심볼(색반전).svg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 펼치기 · 접기 ]
초대
김영삼
권한대행
김상현
권한대행
김명윤
2대
김영삼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transparent; width: 50%; text-align: right;"
평화민주당 총재
민주당(1990년) 총재
민주자유당 총재 및 대표






5.2. 원내총무[편집]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bgcolor=#eee,#222><width=33%> 초대
김현규 ||<width=33%> 2대
최형우 ||<width=33%> 3대
이기택 ||
||<-3><bgcolor=#fff,#1F2023> ||




6. 역대 선거결과[편집]




7.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편집]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
소속기간
이름
직위
비고
1987년 4월 ~ 1990년 1월 22일
김영삼
2대 총재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14대 대통령 (1993.2~1998.2)
신한국당 명예총재
1988년 1월 ~ 1990년 1월 12일
노무현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부산 동구)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의 3당합당에 반발 탈당.
해양수산부 장관(국민의 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33]
16대 대통령 (2003.2~2008.2)



8. 관련 문서[편집]




9. 둘러보기[편집]







''' 1985.5.13. ~ 1988.5.29.'''

[ 임기 개시 당시 ]


[ 임기 종료 당시 ]




''' 1988.5.30. ~ 1992.5.29.'''

[ 임기 개시 당시 ]
여당

125석

야당
파일:평화민주당 로고.svg

71석


60석


35석

무소속

8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99석


[ 후반기 개시 당시 ]
여당

218석

야당
파일:평화민주당 로고.svg

71석

파일:민주당 1990년 흰색 로고.svg

8석

무소속

2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99석


[ 임기 종료 당시 ]
여당

194석

야당

파일:민주당(1991년) 흰색 로고.svg

64석


파일:통일국민당 심볼.svg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7석


파일:신정치개혁당 축약 로고 백색.svg

5석

무소속

15석

재적

285석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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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당계 정당으로 분류되지만 이 당의 대다수가 현재의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며, 보수정당 내의 계파 중 하나인 민주계를 형성하기에 보수정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2] 두산백관 신한민주당[3] 한국근현대사전 신한민주당[4] 반대로 말하면 이전까진 빅텐트 성격도 있었다.[5] 물론 보수정당은 군부계 보수정당인 민주정의당도 뿌리 중 하나긴 하다. 에둘러 보수라고 묶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두 세력은 이념의 뿌리 자체가 다르다.[6] 여담으로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도 한 정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다만 직계인 민주당과 달리 공화당은 이후 여러 이합집산을 거쳐서 탄생한 정당이긴 하다.[7] 당시 정권에서 국내정치를 담당하고 있던 장세동의 안기부는 4월초까지만 해도 신민당에서 이탈할 의원이 잔류할 의원보다 적을 것이며, 그러면 야당 분열의 책임을 놓고 여론이 들끓을 것을 이용해서 개헌 논의 자체를 엎어버리자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분석이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나자 안기부는 당황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8] 이승완 전 호국청년연합회 회장도 사건 당시 배후로 지목되었다.[9] 이는 단일화 실패, 군인의 부재자투표의 사실상의 공개투표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영향이 크다.[10] 득표율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정작 지역구에서 2등으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전국구 의석배분 방식도 득표율이 아닌 지역구 의석 비율을 따른 배분이었기에, 호남을 석권하고 서울에서 의석수 1위를 차지한 평화민주당에 밀렸다.[11] 평민당이 호남 전 지역을 1석 빼고 석권한 반면, 통일민주당은 부산에서는 1석 빼고 석권하였으나 경남에서는 민정당에게 패배하였다.[12] 한겨례민주당은 박형오 1명이 당선됐으나, 평화민주당에 입당한다.[13] 사진에서 가운데에 주먹을 움켜쥔 인물이 노무현이고, 그의 오른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사람이 김상현이다. 참고로 그 앞쪽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김우석으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폭로되면서 구속되었다.[14]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 초선 국회의원이었다. 지역구는 부산 동구.[15] 최형우 입장에서는 저런 이야기가 나올 만했던 것이, 최형우는 유신 체제와 5공화국 시절 상도동계 중진들 중에서도 행동대장 격으로 가장 강력하게 민주 투쟁을 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군사정권에도 찍혀서 10월 유신의 공모를 최형우가 국회 연설에서 폭로하자 당시 임신한 아내까지 남산에 끌려갔을 정도였다.[16] 이때 김영삼은 노무현, 김정길은 어차피 동참 안 할 사람이라면서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노무현은 훗날 "솔직하게 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하며, 이때의 김영삼을 회상하며 훗날 자서전에 나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17] 단, 김상현은 꼬마 민주당에 함께하지 않은 채 무소속으로 남아 있다가 1991년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였다.[18] 당시 경기도 안양시 갑 선거구에서 당선된 초선 의원이었다.[19] 이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1위라고 나와있었는데 해당 갤럽 자료에서 해당 종교 신자들에게 1위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는 김대중 후보였다. 김영삼 후보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 노태우 후보가 3위.[20]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학생 시위도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됐으며 부마민주항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6월 항쟁 때도 서울과 함께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었다.[21] 한편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는 그 이후 30년 정도 뒤에 치른 선거인 제19대 대통령 선거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다시 야도(野都)의 모습을 보여줬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의외로 민주당세가 어느정도 있는 지역임이 드러났지만, 그 이후에 2021년 재보궐선거 부터는 알다시피 다시 보수우위 지역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22] 사실 서부경남은 대구광역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통일민주당세가 약한 지역이 많았으며, 특히 서북부 지역은 말 그대로 TK 그 자체였다.[23] 의외로 노태우가 부산, 경남지역에서도 30~40%의 득표율을 올려 크게 선전하였다. 또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 등 서부 경남지역에서는 노태우가 아예 1위를 차지한 곳도 있었다.[22] 김대중 측에서도 4자필승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근거가 김영삼이 고향인 PK에서 70% 이상 압도적인 득표율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노태우가 이곳에서 표를 잠식시키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24] 당시 부산에서 유일하게 민정당 후보가 당선된 곳이 바로 금정구.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인 동일고무벨트 회장 김진재가 민주당 바람을 뚫고 2위인 이대우 통일민주당 후보에게 1,800여 표차로 신승했다. 워낙 지역기반이 탄탄하게 다져놓아 나중에는 아들인 김세연에게도 지역구를 물려줬다.[25] 당시 강남구서초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26] 당시 강동구송파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27] 물론 서울에서도 김대중이 큰 표차로 앞선 곳이 아니라 많아야 3% 차이로 앞섰을 뿐이었다. 단 총선 때는 평민당 의석수와 득표율이 전부 앞섰다.[28] 해당 지역은 전라도충청도 등지에서 상경한 주민들이 많은 서울 타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PK 원적자들이 많기는 하나 해당 지역 전라도, 충청도 원적자들의 인구 비중과 비교할 때 선거를 좌우할 만큼 크게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지역이다. 또한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의외로 서울경기 출신 원적자 비중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이 당시 선거는 경상남도 출신 후보와 경상북도 출신 후보가 동시에 출마했음을 상기하면...[29] 이 지역의 투표 결과를 좌우한 요소는 주민들의 출신지나 원적지보다도 계급 투표적 측면이 더욱 강했다. 아래 후술하지만 김영삼은 화이트칼라, 경제적 상류층에서 지지도 1위를 차지했다. 하기한 갤럽 자료에서, 김영삼은 중산층 이상에게 높은 지지도를 보이고 나머지 노태우김대중, 김종필 후보 지지층은 거의 유사한 소득 계층 분포를 보이고 있다.[30] 예를 들어 88년에 통일민주당 당적으로 서초구 을 지역에서 당선된 김덕룡 의원은 이후 해당 지역에서 보수 정당 간판으로 4선을 더해서 5선까지 한다(...)[31] 물론 2020년대 현재는 이들도 벌써 70대이기에, 호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보수정당 지지율이 기본적으로 60%를 넘는다.[32] 강남3구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중반 당시에는 캐스팅보트 지역으로 손꼽혔다. 물론 그 이후 보수화 되었긴 하지만, 대구경북마냥 압도적이진 않고 30%대 초반 ~ 40%대 초반 정도의 민주당 지지세가 남아있다.[33] 전임자 한나라당 이명박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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