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민주당(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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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8년 2월 17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구 새천년민주당)이 18대 총선을 앞두고 합당해 창당된 정당. 2008년 7월 6일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으로의 당명변경을 결정하였다.
2. 성향[편집]
"통합민주당은 강령과 정책비전을 통해 서민, 중산층,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정당 실현과 민주 번영 통합 평화 환경을 5대 기본가치로 하는 정당을 자임".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책임, 더 넓은 배려’와 ‘소외계층의 보호' 주장.
3. 당가[편집]
- 총선을 앞두고 율동곡 형식의 당가를 만들었는데, 민주당(2008년) 때도 약간의 수정만 거쳐 그대로 사용되었고, 민주통합당 창당 이후에도 개사 후 그대로 사용하였다.
4. 역사[편집]
4.1. 합당 이전[편집]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배출한 이후 참여정부 결성 즈음에 당 내의 갈등으로 인해 새천년민주당에서 나온 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분열되었고 대통령 탄핵 시도의 파국을 거쳐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한다. 그러나 원내 다수당으로 거듭난 열린우리당은 그 이후 온갖 이합집산과 일부 의원들의 탈당 러쉬, 내부-외부 분열을 거듭한 끝에 와해되면서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다시 창당했고, 최고 파벌을 형성한 정동영이 17대 대선에 출마해 참패를 당한다.
또한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당명을 바꾼[2] 민주당에서는 이인제가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더욱 처참한 지지를 기록했다.
17대 대선 때 무산되었던 합당 협상이 오간 끝에 결국 2008년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은 18대 총선을 앞두고 극적으로 합당에 성공,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약 4년 3개월 만에 복구된 셈.
4.2. 18대 총선[편집]
18대 총선 공천을 위해 대한변협 회장 출신인 박재승 공천관리위원장을 외부에서 데려왔는데, 전과 기록이 한 차례라도 있는 후보에게는 공천을 안 준다는 원칙을 세움에 따라 역대급 물갈이가 벌어져서 공천관리위원회가 아니라 '공천 특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원칙 덕분에 도봉구 을의 설훈과 성북구 을의 신계륜, 중랑구 을의 이상수, 논산시·계룡시·금산군의 안희정, 이인제, 무안군·신안군의 김홍업[3] 등이 출마하지 못 하는 일이 생기고 만다. 이 중에서 설훈, 안희정은 공천 결과에 승복했지만 이상수와 신계륜이 의도치 않게 팀킬을 해서 각각 한나라당 유정현, 김효재[4] 에게 당선을 안기는 결과를 맞았다. 게다가 이인제는 한나라당 - 통합민주당 - 친박연대 - 무소속 전직 의원이라는 제법 강한 경쟁구도에서 살아남았다.[5]
또한 당내 중진 험지차출론이 고개를 들어서 손학규 대표가 서울 종로에 출마해서 현직 의원인 한나라당 박진과 맞붙었고, 또한 정동영 전 대선후보는 과거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주시 덕진구 대신 서울 동작구 을에 출마했다.[6] 본래 동작 을은 교총 회장 출신의 비례대표 이군현 의원이 공천을 받은 상황이었으나 정동영의 등판소식을 들은 한나라당에서는 울산 동구[7] 의 거물인 정몽준을 이곳에 전략 공천시켜 맞불을 놓았다.[8][9][10]
한편 이인제는 논산-계룡-금산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에 반발하며 결국 통합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7.67%(...)를 득표하며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에 복당하지 않았고 한동안 무소속으로 남아 있다가 2011년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인제는 선진통일당 대표가 되어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의 통합을 주도했고, 이후 계속해서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에 잔류한다.
청주시 전 지역구를 얻는 등[11] 충청북도에서 예상밖으로 선전했으나 수도권에서 뉴타운 바람 때문에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는 바람에 81석으로 참패했다.[12]
하지만 촛불집회 정국의 영향으로 두 달 뒤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선전한다.
2008년 7월 6일 전당대회를 통해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하게 된다.
5. 역대 지도부[편집]
5.1. 대표[편집]
5.2. 원내대표[편집]
6. 역대 선거 결과[편집]
6.1. 국회의원 선거[편집]
6.2. 재보궐선거[편집]
7. 관련 문서[편집]
- 민주통합당 (이름이 비슷하나 민주통합당이 나중에 나온 정당이다.)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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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2월 18일에 등록하였다.[2] 엄밀히 말하자면 구 새천년민주당-민주당 법인은 당시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나온 김한길계와 합당, 2007년 6월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2달도 안 되어 김한길계가 도로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합류하는 바람에 다시 당명과 로고를 과거 민주당 시절과 똑같게 되돌리면서 사실상 구 새천년민주당을 계승했다고 취급받는다.[3] 무려 이 쪽인 민주당계의 대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이었음에도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되는 바람에 출마가 막혔다.[4] 이쪽은 단일화가 되어도 당선이 안됐다는 의견이 많다. 왜냐하면 통합민주당 + 신계륜의 득표 수를 합쳐도 김효재의 득표 수에 못미치기 때문.[5] 통합민주당은 열린우리당 당협위원장 출신인 양승숙 예비역 준장을 공천, 한나라당은 김영갑 당협위원장, 자유선진당은 신삼철 당협위원장, 친박연대는 심정수 전 충남도의원을 공천했고 여기에 자유선진당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한 김범명 전 의원이 가세해서 6명 + 최약체였던 통일교 후보 1명의 경쟁구도가 되었다. 결국 27.67%를 받은 이인제 의원이 5선을 확정지었고, 그 뒤로 한나라당 - 민주당 - 친박연대 - 자유선진당 - 김범명 - 통일교 후보 순으로 결과가 나왔다. 이때 한나라당, 민주당 후보는 선거비용 보전을 받았고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 후보도 선거비용 반액 보전을 받는 수준의 득표를 거뒀다.[6] 애초에는 동작구 을에는 통합민주당 현직 의원인 이계안이 있었으나 불출마를 선언한 상황이었다.[7] 현대중공업이 울산 동구에 있다. 정몽준은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이자 1980년대에는 현대중공업 회장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8] 정몽준이 16대 대선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밤에 갑자기 노무현의 통수를 친 이유는 정동영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노무현이 합동연설하는 자리에서 다른 정치인은 안 올린다고 사전에 약속을 했건만 정동영과 추미애를 올렸고 결국 심기가 불편했던 정몽준이 갑자기 통수를 친 것이다. 물론 정동영 본인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지만 여튼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추미애와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단 같은 영남계(추미애는 대구 달성군, 정몽준은 부산 동구)에다, 추미애는 여야 상관 안 하고 친화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나쁜 관계는 아니였는데, 하필 정동영이 노무현의 남자로 불렸기 때문에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9] 참고로 정몽준의 원래 지역구인 울산 동구는 정몽준의 심복인 안효대가 차지했고 18~19대 재선을 했다. 허나 20대 총선에서는 떨어졌다.[10] 이군현은 고향인 통영시-고성군으로 내려가서 현역의원인 김명주의 지역구를 뺏어서(...) 출마했고 18~20대에 내리 3선을 했다. 특히 20대 총선에서는 워낙 이군현이 강했던지라 야당과 무소속에서 후보가 없었고 무투표 당선 되었으나, 선거비리로 2018년에 의원직을 잃으며 정치생명이 끝났다.[11] 남부3군은 자유선진당 이용희 의원이 5선에 성공했는데 이용희 의원이 자유선진당 소속이긴 해도 애초에 출신이 열린우리당이었다. 18대 국회의원 중에서 최고령 의원이었고 19대 총선을 앞두고서 원대복귀했다.[12] 지역구 전국+비례대표 포함해서 81석이다. 참고로 제20대 총선에서 당시 야권인 민주당계 정당이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당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수도권 지역구만 82석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