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T-34 (문단 편집) == [[조선인민군 육군]] == >'''[[조선인민군|저들]]의 T-34 소련제 전차는 [[떡장갑|견고한 무쇠덩어리]]로써, [[대한민국 국군|국군]]을 [[6.25 전쟁|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넣었고]]...''' >[[이강식|나레이션]], [[야인시대]] 81화에서[* 최근의 [[내가 고자라니|야인시대]] [[4딸라|합성물]]에서 자주 봤을 '''[[견고한 무쇠 덩어리]]'''는 [[이석재(야인시대)|이석재]]나, [[의사양반]]이 드는 쇠몽둥이를 지칭한다.] 공산권 대량 공여의 결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육군이 운용했던 전차이기도 하다. [[파일:external/kcm.kr/39de75328bfa517563555a8d1e8c9149.jpg|width=500]] [[T-34#s-1.2.3|T-34-85]] 중형전차, 서울시청 앞의 조선인민군 육군 215번 전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34_knocked_out_September_1950.jpg|width=500]] [[미군]]에게 격파된 북한 육군 소속 T-34/85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b6the7Qdt1rcoy9ro1_1280.jpg|width=500]]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진주한 북한 육군의 [[오토바이|모터찌클]] 부대와 T-34/85 T-34/85는 북한군에게 개전 전까지 242대가 공여되었고 이후 북진 직전까지 150대가량이 추가로 공여되었음이 소련 문서로 확인되고 있다.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고 소련은 미국과 달리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상당히 투자했고 기갑전력 또한 강화시켰다. 208전차 훈련연대를 창설해 전차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과 더불어 T-34 전차와 SU-76 대전차자주포를 견학시키며 전차 운용법을 가르친다. 1948년 소련은 미군정을 철수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북한에 잔류하던 10전차사단 또한 철수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기갑세력의 확대개편을 위해서 한인2세인 표들 중좌와 300명의 전차병을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두고 150대의 T-34/85 전차를 인계했다. 208전차 훈련연대가 10월말 수료했고 최초 208전차 훈련연대의 인원을 주측으로 15전차연대를 창설했다. 15전차연대는 최초 10대의 T-34/85를 인계받고 표들 중좌 연대가 철수하면서 T-34/85 전차 60대와 SU-76 대전차자주포를 30대, 모터사이클 60대를 인계받은 뒤 기갑전력을 강화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은 소련에 T-34 전차 500대 분량을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하기 위해 판매 요청했다. 이때 T-34 전차를 구매할 대금으로 철광석과 금괴, 은을 비롯한 각종광물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500대의 T-34 전차는 2개전차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수량이지만 소련 군사고문단이 미 군사고문단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전차기동이 유럽과는 달리 불편하다고 판단해 항공기 지원으로 바꾸고 절반가량인 총 242대의 T-34 전차를 인수해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제9 전차여단]]이 창설되었다. 당시 한국 육군이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는 무반동총, 2.36인치(66mm) 바주카, 6파운더의 미국 라이센스 57mm 대전차포였는데 무반동총과 바주카는 측면에서 트랙을 끊어 전투불능을 시키는 격파[* 격파라는 용어를 듣고나서 이를 마치 적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격파라는 것은 적의 전투력 상실을 의미할 뿐이며 적을 완전히 파괴하든 당장 전투력만 상실시키든 똑같이 격파라 할 수 있다. 6.25 초기 바주카로 측면에서 T-34를 격파했다는 전과를 찾아보면 어김없이 바주카로 측면에서 T-34를 격파했으나 곧 북한군이 회수해갔다는 내용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어있는데 이 경우 실제로 T-34를 파괴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북한군에 회수되었다면 수리하여 재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사실상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봐야한다.] 전과를 얻는게 최선인 수준이었고 57mm 대전차포는 철갑탄도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으며[*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는 철갑탄 자체가 없었다고 하지만 정작 대전차포 운용병들의 회고에는 철갑탄을 써서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철갑탄보다 고폭탄을 더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하는걸로 봐서 충분한 수량은 아니었던듯.] 철갑탄을 쓰더라도 500m 밖에서는 그 어떤 피해도 줄 수 없고 300m 근처까지 끌어들여야 관통이 가능한 매우 부족한 화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대전차화기들은 이미 독일군의 전차를 전면에서 사격할 경우 [[6호 전차 티거]]같은 중전차도 정면에서 격파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66밀리 로켓탄의 저질 위력 때문에 파괴력 부족이라는 점이 입증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제 성능을 따지자면 2선급 대전차화기였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 육군의 보병용 대전차화기는 이미 능력부족인 상태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너무 일찍 날려버린 탓에 전선에서 후퇴하던 대부분의 57mm 대전차포는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이 대전차포들이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육군 [[대전차병]]들은 공이를 분해하고 포신과 기관부는 수류탄이나 폭약을 이용하여 파괴해야 했다. 개전 당시 국군의 유일한 기갑차량이었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의 37mm 포로 T-34를 저지해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철갑탄]]을 발사하여 T-34의 궤도를 파괴하여 소수의 T-34를 격파(궤도파괴=기동불능=전투력 상실=격파)할 수 있었으나 37mm 포도 통상사격으로는 전차의 무한궤도나 파괴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위력부족이며, 그나마 철갑탄까지 부족한데다가, 매복 후에 1대가 [[무한궤도]]를 사격한 후 전차의 조종수가 전차 전면에 있는 조종수 해치를 여는 순간 그 곳에 핀포인트 사격을 가하는 특이한 사항이 아니면 실질적인 파괴가 불가능하므로 결국 적 전차의 반격으로 엄청난 손해만 입고 말았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에 초기에 투입된 미 육군도 보병용 대전차화기는 한국군의 것과 거의 동일했다는 점이다. 다른곳에 갈 필요도 없이 이 문서에서도 많이 증거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듯 미군은 이미 2차대전 당시 소련에게서 T-34를 받아와서 그 스펙을 알고 있었고 그 T-34로 T-34의 이런저런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테스트도 해보았다. 당시 미군 지휘부도 T-34 전차에 대해 엔진필터가 안 좋으니 소련 공업기술력과 장갑재 관련 사항들을 다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한국 특유의 산악지형까지 합쳐져 미국은 한국 같은 산악지형에 전차는 필요없고 T-34 같은 전차는 바주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수없이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 전차를 상대할 수 없다고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를 무기의 능력부족이 아닌 한국군의 낮은 훈련도 때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미 육군 중 최초로 전투에 돌입한 스미스 특임대대가 대혼란에 빠진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일단 스미스 특임대를 파견하면서 미군이 출동했으니 북한군이 공세를 멈추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것은 없었고 곧 전투에 투입된 스미스 특임대는 용감히 바주카와 무반동총을 가지고 T-34와 맞섰으나 그들 역시 T-34의 측면에서 궤도를 끊는 것과 후면에서 엔진을 멈춰서 총 4대의 전투력을 일시적으로 상실시켜 격파한 것 외에는 아무런 전과를 내지 못했는데 특히 정면에서는 T-34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T-34를 상대로 대패하고야 말았다. 이 전투로 미국은 미군이 사용해도 바주카로는 도저히 T-34를 상대로 실질적인 전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스펙상으로는 바주카로도 T-34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바주카의 집중사격에도 T-34가 버텨내는 결과가 나왔으니 스탈린이 북한에 장갑을 더 두껍게 한 T-34를 보냈다는 소문[* 이후 노획해서 재봤는데 똑같았다.]이 퍼졌고, 이후로도 탄두가 오래된 불량품이었다는 등의 설이 존재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다소간의 미스터리지만 어쨌건 미국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T-34를 상대할만 하면서도 좀 더 배치하기 용이한 병기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에 있던 75mm포 전차 M24 채피 경전차로 일단 저렴한데다가 가까운 일본에 이미 배치되어 있어 재배치가 용이했고 구형 셔먼과 동등한 수준의 75mm포를 갖춰서 75mm 장착형 셔먼전차가 독일의 3, 4호 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T-34 역시 상대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며 경전차라 가볍고 빠르기 때문에 산지에서 운용하기도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50년 7월 4일 빠르게 배치된다. 채피가 배치되자 땅에 떨어져 있던 한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다시 솟아올랐고 미군 채피 전차병들은 기세좋게 T-34와 전차전을 벌였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채피 부대는 T-34와의 모든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겪게 된다. 심지어 T-34 1대가 반파되는 동안 채피 7대가 몰살당하는 등 압도적인 열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채피의 75mm포는 T-34를 실질적으로 전혀 관통하지 못했으며 기것해야 T-34 한두대의 궤도를 끊어서 잠시 진격을 멈추는 격파 전과를 얻기 위해 한 번의 교전에서 수 대의 채피가 끔찍하게 완파당했다. 이 75mm포 전차 채피는 이후 대전차전에 부적합한 병기로 판정되어 정찰이나 보병지원용으로 쓰이게 되는데, 이 시기에도 대전차소총이나 대전차포에 비교적 쉽게 파괴된다는 단점으로 사용에 애로사항이 있었다. 예상과 달리 채피가 처참한 교전비로 T-34에게 아주 간단하게 털려나가자 이를 예상하지 못한 미국은 당황하며 뒤늦게야 한국 지형은 쓸모가 없니, T-34의 성능이 어떠니 하는 주장을 완전히 버리고 가능한 빨리 대량의 전차를 쏟아붙는데 열중하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배치되는 것이 [[M26 퍼싱]]과 M4A3E8 [[셔먼]] 전차로 이 전차들은 대거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M26를 필두로 한 미국 기갑부대는 T-34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고 T-34와 같은 체급인 이지에잇 셔먼도 T-34/85를 상대로 우월한 전적을 내는 등 개전 초기 채피의 참극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며 T-34에 비해 확고히 더 강력한 [[센추리온 전차|센츄리온]] Mk.III, [[M46 패튼]] 같은 전차들이 배치되자 T-34는 초반의 기세를 완전히 잃고 UN군 전차에게 압도적으로 패퇴하고 만다. 개전 초기 한국 육군은 대대급 훈련을 받은 부대가 최정예였던 시절이었을 만큼 훈련도가 부족했고 전차에 대한 무지도 겹쳐 일방적으로 격파당했다. 갓 태어난지 얼마 안된 한국 육군은 사기도 낮고 준비도 부족했던 만큼 많은 걸 바랄 수 없었다. 당장 전차를 격파했다고 알려진 사례의 상당수가 [[SU-76]] 같은 상부개방형 [[대전차자주포]]였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 육군은 전차와 대전차자주포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은 몰려 오는 T-34에 맨몸으로 화염병이나 수류탄을 들고 뛰어 올라 안에다 던져 넣는, 이른바 육탄돌격'로 알려진 처절한 전술로 대항해야 했다. 말이 육탄돌격이지 전차의 기관총 사격 화망을 무릅쓰고 접근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전술로,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실제 전과를 확인해 봐도 실질적인 피해는 줄 수 없었던 것 같다. 1952년에 집계된 256대 파괴전과 중 전차포 97(37.9%), 북한군 유기 63(24.6%), 로켓포 및 [[무반동총]] 35(13.7%), [[항공기]] 29(11.3%), 포병 28(10.9%), [[수류탄]] 3(1.2%), 미군 [[지뢰]] 1(0.4%)다. 다만 [[춘천-홍천 전투]]의 말고개 전투 사례와 같이 이러한 '''육탄돌격'''으로 인해 전차의 기동을 방해하거나 돈좌시킨 사례도 있으며, 개전초기 혼란에 빠진 국군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데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될 약간의 시간을 끌 수는 있었을 것이다. 또한 미약하나마 L-4, L-5,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T-6]]같은 연락기나 훈련기도 간이 무장을 달거나 후방석 승무원이 폭탄 등을 던져 T-34를 몇대 해치웠다.[* 항공기에 의한 기갑 차량 격파 전과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과장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빠른 속도로 한번 공격 후 지나가는 공습의 특성상 피해 평가와 적 장비 식별을 정확히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폭탄과 로켓탄 덕에 밑에는 연기와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적은 십중팔구 공황에 빠져 흩어지니 격파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단한 장갑으로 보호받는 전차는 직격탄이 아니면 의외로 쉽게 완파당하지 않았고 전차가 아닌 차량(6.25 발발 전 북한은 T-34 뿐만 아니라 SU-76도 공여 받았고 전차처럼 전선에서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운용했는데, 이는 적 장비 식별에 혼란을 더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미 파괴된 차량을 가동 중인 적 전차로 오인하는 경우도 흔했다. 2차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특히 대전차 확산탄, 37mm/40mm 기관포, 심지어 50mm 대전차포나 75mm 야포 등 각종 항공기 탑재용 대전차 무기가 사용된 것이 이러한 교훈을 통한 각종 연구 때문이었고, 6.25 전쟁 중에는 의외로 네이팜으로 엔진룸부터 승무원 탑승 공간까지 싹 태워버리는 게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기갑에 대한 공습이 이러한 문제를 딛고 지상군의 전과를 넘어설 정도로 높은 치명도와 정확도 높은 피해 평가가 같이 이뤄지기 시작한 시점은 LGB, 매버릭, TOW 등 효과적인 유도 무장과 타게팅 포드, 레이더 등을 활용한 표적 및 전과 확인이 실전에서 널리 쓰인 걸프전부터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럼에도 코소보 사태 때는 작정하고 숨어 다니며 각종 기만용 더미(통나무, 판자, 풍선 등을 갖고 만든 가짜부터 이미 전력으로써의 가치는 없는 구형 기갑 차량 등)를 뿌려대는 세르비아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에게 제대로 낚여 전과를 실제보다 몇 배 이상 오판하였다.] 물론 육탄특공에서 크게 성공한 경우들도 있는데 이때는 T-34의 약점부위를 정확하게 알고 공략하여 전차를 무력화시켰다. 일단 해치가 열려있을 경우 안에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던져넣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해치가 잠겼을 경우엔 궤도에 박격포탄을 밀어넣어 파괴해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포탄이 불발이 날 경우는 취약한 엔진 상판부위를 노리기도 했고, 연막 등을 이용해 관측을 방해하여 강제로 해치를 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도로정비가 되지 않아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좁은 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마구 운전하다가 전차가 돈좌 또는 전복되서 기동력을 상실하면 치명적이었다. [[http://blog.daum.net/rosiere/8114114|국방부 전쟁사 관련]]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T-34의 또 다른 취약부위는 관측용 잠망경이었는데, 여기에 진흙을 발라 앞을 가리는 방식으로 무력화한 사례도 있다. [[http://koreastory.kr/bbs/board.php?bo_table=6_25&wr_id=15|수기]] 잠망경 부분이 의외로 마무리와 내구도가 허술해 전차에 달려있는 보수용 망치나 돌 등으로 강하게 때리면 비틀려서 공간이 생기는데, 이 약점을 이용해서 공격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http://www.bobaedream.co.kr/board/bulletin/view.php?code=army&No=72252|기타 참고자료]] 다른 취약점은 통풍구 부분이었는데 이곳을 노려 안에다 수류탄이나 화염병 등을 집어넣는 방식의 공격도 행해졌다. 그러나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 방식과 훈련미숙 등의 병크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모되던 중 미 육군이 M4A3E8에 이어서 본격적으로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고성능 전차를 투입한 이후엔 풍비박산이 났다. 만약 북한 육군이 개전 초의 절대우세에 전차를 집중적으로(일명 기갑웨이브) 운용했다면 [[낙동강]] 전선이란 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군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북한 육군의 전차운용은 능숙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초기의 탱크 쇼크 효과에 맛을 들인 북한 육군은 전선 강행돌파시에 전차를 자주 동원했다. 이는 소련군의 작전기동군 교리에서 많은 점을 참조한 것이나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 충분한 화력지원과 후속 증원부대의 신속한 투입이라는 점은 빼먹고 기습과 탱크 쇼크의 시너지만을 고집하여 충분한 화력지원 없이 전차와 자주포, 보병만 일회성으로 덜렁 보내곤 했다. 전사를 살펴보면 야간에 전차나 자주포가 뜬금없이 [[갑툭튀]]하여 국군과 UN군이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지만 포격이 동반되거나 돌파구를 후속부대가 확장하여 전선 깊숙히 침입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에 반해 한국전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국군은 낙동강 전선이라는 천혜의 방어막과 UN군의 막강한 지원화력을 십분 활용, 강행돌파 예상지점에 화망을 미리 구축해놓고 T-34가 걸려들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있는 화력을 모두 끼얹어 버렸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 당시 북한 육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절]]까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초조하게 서두르고 있었기에 이는 큰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이러한 양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전차병들의 숙련도도 낮은 편이어서, 미군이 투입한 이지에잇은 제원상으로는 T-34/85에 열세였으나 승무원들이 2차 대전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다 겪어본 베테랑들인데다 조준장치도 더 좋아서 T-34/85를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이후 북한 육군의 전차는 미 육군의 [[M26 퍼싱]]이나 [[M46 패튼]] 등의 고성능 전차들에게 다 터져나갔다. 북한군의 전차는 1950년 겨울 즈음엔 거의 전부 소모된 상태였으나, 중공군이 개입시 전차도 갖고 왔기에 T-34/85는 전선에는 계속 나타났다. 참고로 3.5인치(89mm) [[바주카#s-2.6|슈퍼 바주카]]의 보급에 힘입어 바주카포로도 전차의 전면에서 충분한 타격을 줄 수는 있게 되었다. 물론 미 육군의 퍼싱이나 영국 육군의 센츄리온 같은 신형 전차들이 왔으니 T-34/85는 더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T-34는 현재 한국 육군의 전략,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차로 [[K-1 전차]]의 개발과 배치를 위시한 국군 전차전력의 강화엔 이 T-34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전쟁 초기 T-34를 앞세운 북한 육군의 빠른 공세에 아무 것도 못하고 밀려난 경험은 지금까지 국군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그것이 각종 신형 전차와 대전차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대전차 방호벽 또한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북한 육군 기갑부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있는 것이다. T-34/76은 오랫동안 북한 육군에 없었다고 알려져 왔다.[* 위 내용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T-34/85가 개발된 이후 76mm 장착형은 생산이 중지되고 이미 있는 재고들은 전선에서 소모되면 상태에 따라서 그대로 폐기하거나 쓸만한 부품을 몽땅 떼내어 유용한 다음 폐기하곤 했기 때문에 1945년 종전 시점에서 76mm 장착형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MBC 드라마에서 T-34/76을 사용하는 장면이 방영되어 고증오류라고 까이기도 했다. [[http://shyne911.tistory.com/m/434|MBC 드라마의 등장 장면]] 그런데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1&num=152602|BBC의 다큐멘터리의 한국전쟁에 투입된 T-34 중 76형 모습을 발견했다.]] 북한 매체에서 북한 육군이 T-34/76으로 추정되는 전차를 사용하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현재 평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T-34/76 1대 전시되어있다.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전차인 OT-34는 T-34/76을 개조해서 차체전면 기관총자리에 화염방사기를 부착하는 동시에 76mm 주포는 사용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한 전차이다. 소련군에는 T-34/85 사양의 화염방사전차도 존재했지만 T-44와 T-54의 화염방사 차량이 당장 없는 상황[* T-54가 47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하여 1950년에는 두가지 형식을 합하여 2천여대가 뽑혀나온 상황임에 반해 T-54의 화염방사 차량인 Object 481(OT-54 또는 TO-54)은 55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주포를 완전히 화염방사무기로 변경한 완전한 화염방사전차인 Object 483은 당연히 취소되었고 T-55사양의 화염방사 전차인 TO-55, Object 482는 60년 또는 61년에 양산하기 시작하여 10대 정도가 생산되었다. 전부 합쳐서 100대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전체 T-54계열 생산량에 비하면 한줌 수준이며 한국전 당시에는 양산되지 않아서 의미도 없다.]에서 이 전차들은 소련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남겨둬야 했다. 그래서 소련군이 공격용으로 화염방사전차를 줄 경우에는 OT-34/76을 줄 수 밖에 없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