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진군 (문단 편집) == 역사 == 강진이라는 지명은 도'''강'''의 강과 [[탐진강|탐'''진''']]의 진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백제]] 시대에는 지금의 병영면에 있던 도무군(道武郡)과 강진읍에 있는 동음현(冬音縣)이 있었다.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을 바꾸면서 각각 양무군(陽武郡)과 탐진현(耽津縣)이 되었다. 양무군이 이후 고려시대에 도강군(道康郡)으로 바뀌었다. 다른 설로는 역으로 강진과 탐라(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따서 탐진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는데 전후 사정으로 봐서는 탐라가 탐진에서 생긴 게 맞는 것 같다고.[* 그러나 [[탐라국]]의 기록이 탐진보다 훨씬 이르다. 탐라국은 삼국시대에도 이미 여러번 등장하지만 경덕왕은 [[남북국시대]]의 인물이다.] 그래서 강진을 '''탐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 [[명종(고려)|명종]] 2년(1172년) 이곳에 감무를 두어 행정과 병사를 병무하게 하면서 전라도 남해안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전라북도]] [[부안군]]과 함께 한반도의 [[고려청자]]의 [[강진 고려청자 요지|생산 중심지]]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다. 강진 도암면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는 고려의 무신 집권기 당시 요세 스님이 [[지눌]]의 영향을 받아 백련 결사를 제창한 것으로 역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 [[태종(조선)|태종]] 17년(1417년)에 이르러 [[광주광역시|광주목]]에 있던 전라도 병영을 지금의 병영면 자리에 옮겨 만들었고 이때 비로소 강진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는 지역 군 사령관의 주둔지였다는 뜻이다. 오늘날로 치면 군 사령부가 있는 군사도시의 성격이 강했다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 을묘왜변 당시에는 이 지역이 격전장이 되었기도 했다. [[한양]]에서 멀고 워낙에 한적한 동네였기에 조선시대 때 [[유배]]를 당해서 이 지역으로 오는 경우가 꽤 많았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대표적 인사가 조선이 낳은 천재 '''다산 [[정약용]]'''. 그가 유배 생활 중에 만덕산에 지었던 [[다산초당]]은 현재까지도 강진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명망이 높다. [[삼국시대]]에 육지에서 [[탐라]]에서 키우는 [[조랑말]]의 식량을 마량으로 거쳐간 후 탐라로 선적했으며 반대로 탐라에서 나오는 조랑말을 한양으로 올려보낼 때 탐진의 마량을 거쳐서 올라갔다고 한다. 마량은 원래 말의 식량(馬糧)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은 馬良이라고 한자를 바꿔서 쓴다. 그러함으로 인해 제주도와의 관계가 여전히 돈독하다. 그 뒤 1896년에 강진군으로 승격한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 강진군으로 남아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단행된 부군면 폐합시에도 다른 군을 흡수하거나 흡수 당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1930년대 중반 강진읍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나진]], [[혜산]]과 같이 설치된 것이다. 나진, 혜산은 후일 [[나선특별시]] 나진구역과 [[양강도]] 도소재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컨대 강진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으로 인하여 현지인들이 대차게 피해를 뒤집어썼다. 1983년 신전면, 1989년 마량면이 설치되었고, 1990년 8월 1일 해남군 옥천면의 1개리를 이관받아 오늘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