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니카 (문단 편집) === 게르니카 폭격 === [[스페인 내전]] 당시인 [[1937년]]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이 [[스페인 제2공화국]] 세력권이었던 게르니카에 가한 폭격이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의 우익 진영과 공화파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선거로 정당하게 집권했음에도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진영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고 수많은 스페인 주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하며 전쟁을 벌였다. 이 무렵 유럽 전역에는 경제난의 여파로 인해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피카소]]도 이 내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 나라의 다른 지식인들처럼 피카소도 공화파에 가담했다. 피카소는 직접 내전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공화파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전 중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큰 돈을 쉽게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전 기간에 피카소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아마 ‘게르니카’라는 그림일 것이다. 유럽 전역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1937년 6월 [[프랑스]]는 세계 박람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52개국이 참가하게 될 이 박람회에는 각 나라를 대표할 만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공화파는 피카소에게 박람회장에 전시할 그림으로 에스파냐의 현실을 알릴 수 있는 작품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구상하던 중 신문을 통해 참혹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프랑코를 지원하여 파견된 독일 군인들 중 독일 공군 출신의 의용 군단 '콘도르 군단'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폭탄을 퍼부었다는 것이었다. 이 폭격으로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은 평화로운 마을 게르니카는 불과 네 시간 만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하필 이 날이 시장이 열려 한창 장사 중이던 장날이라 많은 주민들이 시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가 더욱 커졌고 목숨을 잃은 사람은 150~166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자 피카소는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지 약 한 달 만에 7.5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작품을 완성한다. 이 그림이 바로 ‘게르니카’이다. 때로는 몇 천 마디의 말, 몇 백 권의 책보다 단 한 점, 약 21 제곱미터의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 광기를 입체파 화풍을 통해서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전쟁의 잔인함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