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선 (문단 편집) == 역사 == 처음 과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 문헌이다. 하지만 고려의 과선에는 명칭에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남아있는 것도 한자 명칭 뿐이라서 학자에 따라 주력 돌격선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다는 주장도 있고, 창([[과]])을 든 군사들이 빠르게 적선에 접근하여 접근전을 벌이는 선박이라 과선이라 이름지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려]] [[현종(고려)|현종]] 2년 ~ 숙종2(1011~1097)이다. 당시 고려는 동해안 지역에 횡행하는 도이적(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일명 도부서)라는 일종의 해상방위 사령부를 각지에 두고 해적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이 때 등장한 배가 바로 과선이다.고려말기에는 진포대첩에서 누전선가 함께 주력선으로 왜구를 격파했다.관음포 전투에서 주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흔히 여진족을 기마민족으로만 여기기 쉬우나 이들은 자신들의 특산물인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배를 사용해 장거리 해상 약탈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은 도이적(되놈+도적)으로 불렸는데, 어느 정도냐면 일본 왜구들의 본거지 중 하나인 '''규슈가 털릴 정도'''였으며, 한 번은 일본에 엄청난 해상세력이 쳐들어와 "고려 해적들이 쳐들어왔구나!" 해서 격전이 벌어져 일본이 힘겹게 싸워 이기고 적병들을 사로잡았는데 포로 중에 해적들에게 사로잡힌 고려인이 있어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보니 고려인 왈, "나는 고려 수군이고, 저놈들은 도이적(여진해적)인데 저들과 싸우다가 사로잡혔다"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하 한국해양사 고대편 참조.[* 비슷하게 기마민족으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의 [[코자크]]들도 조그만 배들을 타고 흑해를 들쑤시며 오스만 제국의 배들을 탈탈 털고 다녔다.] 1419년 대마도 정벌때 200척 이상 투입되었으며 방패를 설치하고 고려시절[[관음포 전투]]때와 지휘소를 가추어 원정에 나섰다.124척에 왜선을 격파하며 왜구에게 1383년 관음포전투 이후 36년 만에 위험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