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부천대 (문단 편집) == 과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국부천대.gif|width=100%]]}}} || || {{{#ffffff '''중국국민당의 이동 과정 (지도는 1947년 기준)'''}}} || 1949년 4월 수도 [[난징시|난징]]이 함락 직전까지 몰리자 [[중국국민당]]은 [[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었던 [[쓰촨성]] 등의 중국 서남부로 다시 정부를 옮길 생각이었다. 이때 [[중국국민당]]의 [[타이완 섬]] 이전을 건의한 것은 지리학자 장치윈(장기윤, 張其昀)이었다.[* 장치원은 국민당의 국부천대 이후 교육부장, 국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계 및 관계에서 활약했고 오늘날 대만의 유력 대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중국문화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 1985년에 타계하였다.] 장치윈에 따르면 대만은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자원이 있고 공산당 세력이 미약한 데다 섬의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서 대만은 일본이 장기간 점령한 상태라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없다는 점도 [[장제스]]의 흥미를 끌었다. [[난징]]은 결국 1949년 [[4월 23일]] 함락되었고 이후 국민당 정부는 [[타이베이]]에 정착하기까지 8개월간 [[광저우]], [[충칭]], [[청두]] 등을 전전했다. 난징 함락 후 국민당 정부는 일단 광저우로 퇴각했으나 중공군이 화난(華南, 화남) 지방을 석권하면서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3일]] 광저우를 버리고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1월 30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국민당은 재차 청두로 퇴각하였고 [[12월 7일]] 쓰촨성 시창(西昌)에 대본영(총사령부)을 남겨 두고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12월 27일 [[청두]]는 함락되었고 시창에 잔류한 국부군은 이듬해 4월까지 저항을 이어가다가 중국공산당에 점령당했다. 일부 잔존 국민당 병력은 미얀마나 태국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타이베이]]는 정식 수도가 아니라 본토를 수복하기 전에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이 임시로 머물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곳이었지만[* 명목상 수도는 여전히 [[난징]]이다.] 현실적으로 섬에서 대륙을 수복하는 것은 대만을 아무리 발전시켜도 불가능하였다.[* 국민당군이 난징은 물론 충칭에서도 막지 못했던 공산당군을 섬인 대만에서 대륙으로 상륙작전을 펼쳐 뚫는다는 것은 얼핏 생각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유일한 방법은 외세, 특히 [[미국]] 등 자유우방의 힘을 빌리는 것뿐인데 미국은 당연히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직행할 수 있는 무리한 대륙 수복을 반대했다. [[장제스]]는 [[6.25 전쟁]]을 기회로 하여 [[국광 작전|대륙 수복을 시도]]했으나 그마저도 무산되면서 중화민국이 대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더욱 요원해지게 되었다.] 오히려 [[타이완 섬]] 방어에 온 힘을 다 해도 모자랄 판이고 그 결과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