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부천대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lag_map_of_China_&_Taiwan.png|width=100%]]}}}|| 천대 이후 [[국공내전]]은 당연하게도 중국공산당의 사실상 승리로 끝났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 전역을 석권하였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단, 실제 건국 선언은 국부천대 이전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선언을 한 것은 내전이 끝난 후가 아니라 내전 도중이다. 난징 함락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과도기로 볼 수 있으며 대륙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넓은 나라[* [[대영제국]], [[소련]], [[미국]]에 이은 4위]에서 [[경상도]]보다 조금 더 큰 넓이로 축소되었고 인구 역시 인구 5억 6,000만 명의 세계 최다 인구를 보유한 국가였지만 800만 명 남짓으로 축소되었다.[* 1950년 당시 일본(8,300만 명)의 10분의 1, 남한(2,000만 명)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북한(950만 명)보다도 더 작은 규모였다. 물론 중앙군 50만 명을 비롯해 국민당원과 그 가족, 반공 성향의 피난민까지 합쳐 200만 명이 타이완으로 오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에도 명목상 내전이 끝나지 않았으며 신생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기존 국가 중화민국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두 국가는 서로를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6.25 전쟁]]처럼 휴전 내지는 종전 협정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950년대 중반으로 이 전쟁은 이후 더 이상 뺏고 뺏기는 땅 없이 교착상태를 유지하다가[* 사실 6.25 전쟁 역시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지만 밀고 올라가고 밀려가기를 반복한 것은 처음 1년이고,나머지 2년여 동안은 빼앗고 빼앗기는 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1년이 지난 뒤부터 휴전까지는 남북이 대치하는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과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 1970년대 말에 사실상 종전 상태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양안이 휴전이나 정전 협정을 특별히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대만에 대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적은 있으나 이 역시 양자간의 어떤 형태의 협정이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지금은 이미 멸망했고 과거 중화민국의 권리'''만'''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하게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후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국채라던가 기타 [[국가승계]]의 의무는 모조리 타이완에 있는 국민당에게 해결하라고 뻐기거나 아예 외국 자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금 있는 중화민국은 말하자면 중화민국을 참칭하여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는 국민당의 불법 정권인 셈이다. 중화민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러모로 [[남북관계]]와 유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첫째로 최소한 협정의 주체로서는 인정하여 휴전 상태인 남북한과는 다르게, 두 '중국'은 어떠한 협정조차 맺은 적이 없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교류나 민간교류가 지극히 적거나 거의 없는 남북한과 달리, 중국과 대만은 경제적 교류[* 중화민국(대만) 최대의 기업인 [[TSMC]] 해외공장 중 최초로 지은 곳이 중국 [[상하이]]에 있다. 그 외에는 미국 워싱턴 주까지 2개만 있었다가, 미국 아리조나에도 짓게 되었는데, 2021년 일본 구마모토현에 대규모 TSMC 공장단지 설치 공사가 시작되었다. 2023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에도 짓고 있다. 대만기업 중 중국에서도 영업하는 곳들이 적지 않다.]나 민간교류[* 이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논의는 1970년대부터였고, 당시에는 3통이라고 불렀다. 무역-편지-여행이 그 3이다.), 계속 교류과정 간소화 시기를 거쳤는데, 21세기부터는 간소화가 완벽해져서(대3통이라고 부른다.) 그냥 일반적인 외국여행 수준으로 간편하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입국하도록 했다가, 21세기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21세기부터는 중국인과 대만인끼리의 혼인도 엄청나게 많다. 스포츠 교류도 많아서, 21세기부터는 중국에서 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에 대만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도 대만인들을 보면 경계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만인 관광객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허용되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양안관계|중국의 분단 체제]]와 장제스의 독재 체제 자체는 오히려 국부천대를 통해 완성되었다. 기존의 군벌 세력을 기반으로 하며 국민당 내외에서 장제스를 견제하였던 정치 세력들은 국부천대로 인해 중국 본토에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기반을 상실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를 견제할 힘을 잃었으며 장제스는 확고한 1인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국부천대에 따라 사실상의 수도는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옮겨졌다. 하지만 천도 이후에도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명목상 '''[[중화민국/영유권 주장 지역|중국의 정통 정권임과 중국 전체의 통치주권]]'''을 천명했으며 [[수도(행정구역)|수도]]를 [[난징]]이라고 명시했으나 [[천수이볜]], [[마잉주]] 집권기를 전후해서 '중국의 정통 정부' 및 '법적인 수도'에 대한 인식이 약해졌다. 행정원이 발행하는 연감에선 아예 대륙지구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정부 관료들도 당당히 "중화민국의 수도는 타이베이"라고 말한다. 이때 [[중국국민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성]][* 국부천대 기준. 중화민국의 현행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타이완성뿐만 아니라 타이완 성에서 분리된 직할시들도 포함된다.] 관할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외성인]]이라 부르며,[* 당연히 [[푸젠성(대만)|푸젠성]] 관할인 진먼, 마쭈를 여기에 포함하지 않는다.]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타오위안]] 등 대만 섬 북부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아무튼 국공내전 덕에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변방의 고만고만한 도시 중 조금 큰 도시'에서 '중심 도시'로 변모해 버렸다. 1661년에 세워진 타이완 [[동녕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타이완 섬 남부에 있는 [[타이난]] 이래 중국 역사에서 수도를 섬에 둔 첫 사례인 것이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건국을 선언하자 기존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전격 취소해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그 뒤를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뒤따랐는데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들도 이를 뒤따라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자국령인 [[홍콩]]의 안보를 걱정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빠르게 승인한 서방 국가가 되었다.[* 당시 홍콩은 어쨌거나 중국 본토로부터 수도 등을 공급받지 않고서는 자립하지 못할 처지였으며 중국은 계속해서 홍콩에 각종 물자를 저렴하게 공급했는데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 등 서방 세계 국가와의 교류창구를 남겨두는 차원에서 전략적 이해가 있었다. 영국 입장에서 자국의 금융자본의 상당 부분이 투자된 홍콩은 이미 너무나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중국의 이해와 영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노르웨이는 몰라도 영국만큼은 미국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에 홍콩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중국 공산정권을 승인할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륙 지배를 돌이키기 어려워진 1960년대부터는 너도나도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