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족 (문단 편집) === 엘리트 전사 계급의 탄생 === 서유럽에서 귀족은 중세의 전사 계급이었다. 세련되고 우아하기보다는 오히려 호전적이고 상무적이었다. 유럽 이외에도 전사계급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 귀족층은 일본사의 [[다이묘]]나, 신라의 [[화랑]]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고대의 귀족층,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경대부(卿大夫)나 인도의 [[크샤트리야]] 등 보편적인 현상이다. 원시적인 시대에 과연 말 같은 것들로 설득해서 귀족이 되었을까? 오히려 근본을 따지자면 조상이 학자 같은 게 아니라 군인인 사람들이 훨씬 많다. [[중세]] [[유럽]] 때부터 내려온 귀족 가문들의 시초는 여러 경로로 흘러들어온 호전적인 이민족들이었다. 이들의 숫자가 많아져 제압을 할 수 없었고, 차라리 회유책을 썼는데 교황청에서 그들에게 '''DUX'''라는 칭호를 내렸고 이것이 오늘날 공작을 의미하는 '''DUKE'''의 시초가 된다. 중세보다 훨씬 이전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귀족층은 중세 귀족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모두 군인 출신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귀족들은 군인이면서도, 학자 내지는 정치인이었고, 종종 무역상이나 기술자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로마 원로원(세나투스)의 경우에는 플라미니우스가 "원로원 의원은 상업활동에 종사할 수 없다"고 입법해, 로마 귀족을 뜻하는 직위 중 하나인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들은 무역상이나 상인으로 종사하지 못했다. 서유럽 귀족들에게 이상적인 귀족 집단으로 묘사된 로마 귀족들은 노빌레스로 불리지만, 엄밀히 서유럽과 같은 의미의 순수혈통 귀족 내지 전통세습귀족으로 불릴 수 있는 집단은 파트리키다. 물론, <12표법>을 시작으로 귀족과 평민의 통혼이 인정된 이래의 공화정 시대에서 귀족(파트리키)/평민(플레브스)의 개념은 희미해졌고, 그 과정에서 플레비스 계층 중 원로원 의석을 얻은 평민 계급에 속한 원로원 귀족들은 신귀족, 평민귀족 등으로 불린 이들이 등장해 '명망가(노빌레스)'로 불리거나 원로원 가문이라고 불리긴 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세 귀족과 평민 사이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 로마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귀족(파트리키)'은 초기 로마 왕정 시대부터 엘리트 전사계급 성격보다는, 재산 기준상 플레브스(평민)과 대비되는 성격을 가진 집단에 가까웠다. 이때 귀족의 개념은 켄투리아 의회에서의 우선 투표권과 발언권을 보장받고, 사제 담임권을 가지는 의미의 시민권적 특권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애당초 로마 초기 사회에서 재산과 집안 내 서열로 계급을 구분한 이유도 이것 때문인데, 로마군 편제의 시작을 보면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재산 기준은 전시상황에서 자비로 말, 무기, 식량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에 따라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로마 왕국의 군사제도에서는 병사 자신의 재산으로 무장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말을 사서 무장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 기병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의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군인이 직업이자 상비적 개념으로 변모하면서 바뀌게 된다.] 그럼에도 귀족이란 같은 씨족 내에서 가장이나 가부장권을 가진 이들로 지칭되는 경우도 있어, 같은 시조를 둔 씨족 안에서도 코그노멘(가문성씨)을 다르게 가져가는 씨족 내에서도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기도 했다.[* 따라서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씨족 같은 대귀족 가문들 역시 씨족 내에서 귀족지파와 평민지파로 분화되면서도 그 전통을 공유했다.] 로마 세계에서 전설 시대로 불리는 왕정 시대부터 공화정 초기까지의 귀족이란, 로마 사회 안에서 보다 많은 의무를 지는 만큼의 특권을 보장받는 집단 내지 각 씨족 가문들의 가부장과 그 일가 개념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 전통혈통귀족, 즉 파트리키 씨족으로 유명한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파비우스, 유니우스 가문 등을 보면 일반적인 서유럽의 중세 이후 귀족들과 달리 한 가문의 범주에 들어가는 씨족 가문들 사이에서도 코그노멘(지파성씨)에 따라 귀족, 평민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물론 [[율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만리우스 씨족처럼 집안 지파들 전체가 파트리키인 씨족 가문들도 있긴 했지만, 이들은 공화정 초기 이후 거진 대가 끊겨 사라지게 됐다. 따라서 왕정 이래 순수혈통을 유지하며 모든 지파가 귀족을 구성한 율리우스, 만리우스, 파피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세르빌리우스 씨족 가문들은 기원전 1세기를 끝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세르빌리우스 가문을 제외하곤 먼친척 중 그나마 찾을 수 있는 평민을 입양조차 거부해 멸문하게 된다. 이런 차이 외에도 고대 로마 사회에서 귀족이란, 공화정 시대부터는 파트리키와 노빌레스/ 플레비스가 있고 그 사이에는 공화정 후기부터 급부상한 또 다른 평민 집단의 갈래인 기사계급([[에퀴테스]])[* Equites. 라틴어로 기병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계급 다음가는 신분으로, 제정 시대가 되면서부터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파트리키/노빌레스 가문들을 대신해 로마 귀족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이 출현했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부터는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와 노빌레스, 플레브스 등의 관계 역시 초기 로마 시대부터 플레브스(평민) 계급의 경제 상황이 오래된 명망가인 극소수의 파트리키 내 대귀족를 제외하면 파트리키보다 낫거나 대등한 수준인 경우가 나타나면서 의미가 조금은 변하게 된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때의 귀족과 평민 사이의 통혼이나 상호 입양 역시 우리의 생각보다 꽤 많았다. 당장 고대 로마 파트리키를 대표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대귀족 명망가 풀케르 가문만 하더라도, 이 가문의 차남이 평민계급에 속한 노빌레스 가의 리비우스 드루수스 집안으로 입양되거나 본인 스스로 아예 평민의 양자가 되어 호민관에 입후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고대 로마사, 라틴사를 연구하는 서양학자들은 고대 로마 귀족과 씨족 연구에서 귀족을 공화정 중기 이후부터는 평민(플레브스)와는 같은 로마시민권자 중 대비되는 계급 정도로 해석하며, 제정 시대 이후의 로마 귀족 역시 중세 서유럽 귀족처럼 군인이며 전사 개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중세 유럽의 귀족과 달리, 로마 귀족의 개념은 로마시민권자로 동일한 징병의무와 시민권적 권한 행사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는데,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가령 고대 로마 사회에서 귀족으로 퉁칠 수 있는 원로원 가문들은 왕정~전제정 시대까지 몸이 멀쩡한 성인남성이라면 군대에 들어가거나, 못 가더라도 군대 경력을 쌓아야 엘리트로 인정받았다. 이는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 그리스, 푸닉(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 아나톨리아, 시리아, 레반트 출신의 신흥 귀족들이 원로원 내 부와 권력을 쥐기 전까지 당연시된 전통이었는데, 서기 2세기 후기 이후에도 로마 제국 안에서, 속된 말로 본인과 출신가문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싶다면 군대 짬밥이라도 맛을 봐야만 제 구실을 할 줄 아는 엘리트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 상류층들의 교육 방법은 기본적으로 서양 중세 귀족들처럼 무인으로서 필요한 교육을 체득하고 직접 구르면서, 그 속에서 국가 사무에 필요한 행정, 외교, 인사 등을 배우는 방식이 필수였고 이는 황실이나 대귀족과 같은 지도계층이라면 장애가 있지 않는 이상 일평생동안 담당해야 할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들인 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제왕교육을 함에 있어 군입대 후 최전선에서 싸우게 하거나, 여건상 두 후계자를 동시에 전선에 투입하기 어려운 속사정이 있다면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례처럼 자신의 집무실에 남겨두고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 군대 사무를 체득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장애가 있던 또 다른 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쪽을 절던 그는 즉위하기 전까지 정치, 행정, 군대 관련 지식에 필요한 역사, 의학, 지리학 등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 아래 갈고 닦았다.] 따라서 로마 귀족이 우리가 흔히 아는 중세 귀족과 평민 사이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고대 서양 귀족 중 대명사인 로마귀족 역시 중세 귀족과 차이가 있더라도 "군인=귀족"이었고, 군대 경험과 입대는 귀족에게 있어 특권 중 최우선시되는 조건 중 하나였다. 동시기 동아시아에서 귀족층은 화랑을 위시한 신흥 무인세력보다는 전통적으로 [[제사장]] 계급이었다. [[천자]]나 [[천황]]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 동아시아에서 군주는 하늘이 부여한 계급이며 다른 귀족들은 그 군주가 권한을 위임한 계층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귀족계급의 태동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적 관점보다는 문화사회학적 관점이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맞다. 중세 이후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정확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지역 영주나 부족의 족장이 그대로 귀족 계급이 된 건 사실이다. 즉, 제사장 같은 성직자들은 막 국가화를 이룬 세력의 창립멤버들이고, 주로 군사력으로 지배력을 얻은 귀족들은 그런 시스템이 세워진 나라나 지역에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이 합류하여 지배층이 된 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사례들을 보면 군사 귀족들이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결국은 사람들의 인망을 모아 탄생한 초기 귀족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고 귀족 계급을 완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결과로 여성 귀족의 상대적 지위 하락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게르만족 역시 게르마니아 등을 보면 초기에는 흔히 생각하는 후기의 귀족들 대신 제사장 등이 귀족 취급을 받았다. [[일본]]에서 지배계층인 [[공가]]나 [[사무라이]]가 형성된 과정도 이런 식인데, 본래 일본의 군주는 단순한 군주가 아닌 고대 [[일본]] 사회의 세습 신관을 중심으로 뭉친 제정일치제 부족 사회의 우두머리였고, 공가는 그 주변에서 대제사장 역할인 군주를 보필하는 이들이었으며, 사무라이는 나중에 국가의 기틀이 얼추 갖춰진 [[헤이안 시대]] 쯤에 뒤늦게 일본 사회에 편입된 지방 호족들이 기원이다.[*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군주인 [[히미코]]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무녀였다는 기록이 있고, [[헤이안 시대]] 당시에 지금의 [[간토]]와 [[도호쿠]] 지방을 정벌한 뒤에 투항해온 [[아이누족]] 추장들에게 [[후지와라]] 성을 사성하여 오슈 후지와라씨, [[아베씨]] 등의 [[사무라이]] 가문의 기원이 되었다. 일본에서 여성 군주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은 사무라이 이전에 군사 귀족들에게 천황 자리를 중간에 찬탈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무라이들은 처음에는 군사 귀족보다 귀족들의 시종 비슷한 취급을 받아서 그 영향이 나중에까지 미쳤다.] 그래서 일본사 내내 아무리 사무라이가 [[막부]]를 세워서 공가와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을 정도로 위세가 강했을 때조차, 감히 공가 측과 맞먹으려들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추신구라]] 사건의 원인도 바로 이것이다. [[쇼군]]을 중심으로 한 무가 세력의 권위가 정점에 이른 [[에도 막부]] 시대에서조차, 감히 [[천황]]의 칙사 앞에서 쌈박질을 벌이는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다이묘]]까지 할복해야했을 정도니, 권력이 없어도 공가들의 권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사무라이라는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시종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초기 귀족들의 [[성채]]는 전투를 하기 위한 막사에 가까웠다. 창문이 거의 없다시피하고 돌로 된 건축물이기 때문에 위생적으로도 상당히 안 좋았다. [[성(건축)|성]] 문서에서도 보듯이 [[11세기]]에서 [[12세기]]에 세워진 성채들인 킵(keep)의 경우, 성터 주변을 파서 [[해자]]를 만든 후에 파낸 흙을 해자를 따라 쌓은 후에 그 위에 목책이나 석벽을 올린 일종의 토성(土城)이었고, 귀족들은 그 가운데에 세워놓은 탑 모양의 저택에서 살았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킵이 방어탑의 일종으로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가 아는 멋들어진 성관(城館)에서 살게 된 건, 방어건물로서의 성의 의미가 쇠락하고 순수한 방어건물인 [[성형 요새]]가 그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의 일이다.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Knight) 계급이 되었고, 전투가 없을 때 본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문화가 무도회, 전투력을 증명하는것이 필요했기에 만들어진 스포츠가 [[토너먼트]], 그리고 일상에서도 지속적으로 강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 했는데 그게 지나치게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제동을 걸기 위해 만들어진게 소위 말하는 [[기사도]]라고 볼 수 있다. 서양의 근대화는 바로 이런 귀족문화의 철폐에서 시작됐다. 또한, 봉건 [[영주(중세)|영주]]의 계약에는 40일간의 의무복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간이 넘어가면 왕은 급료를 줘야 했고, 외국으로의 공격인 경우에는 영주가 참전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어전인 경우, 급료는 받을 수 있지만 참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왕이 사라지면 계약관계에 의한 영주의 권한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 하지만 여전히 40일이 넘어가면 그 값을 치러야 했다. 후기로 갈수록 직접 참전하는 대신, 왕에게 '방패세'를 내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을 사는 방식을 택했다.[* 사실 이런 면은 근대 [[유럽]] 귀족사회에서도 근근히 이어져서, 귀족들 중에는 [[군인]]으로 출세하는 사람도 많았고, [[게르만족]] 문화에서 유래된 [[결투]] 등의 풍속도 오랫동안 잔존해있었다.] 다만, [[북유럽]] 지역은 다른 유럽의 귀족들과는 양상이 달랐는데, [[스웨덴]]의 귀족들은 세금 면제 등의 특권을 누렸으나, 영지를 하사받지 못했으며, [[농노제]]또한 없었기에 기본적으로는 부유계층에 불과했다. 동양권도 귀족 계급의 시작은 별로 세련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동양권의 귀족은 [[부족연맹]]이 [[국가]]라는 좀더 진보된 정치체제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대부분 문관과 무사, 제사의 보조를 담당하는 직책을 병행하던 이들이 자신들의 직책을 세습하면서 하나의 특권 계층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된 국가가 주변국을 정복하거나, 자국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본래 독립국의 군주이거나, 부족의 족장이었던 이들을 우대하는 과정에서 귀족 계층이 생겨나거나 확대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야]] 멸망 후에 가야의 왕족들이 [[신라]]에서 [[진골]]로 대접받았던 것이나, [[상나라]] 멸망 이후에 세워진 [[주나라]]에서 주나라 왕실의 친척이거나, 왕실의 등극을 도운 주변국의 군주들에게 봉토를 분봉해준 것이 있다. 특히, 고대 [[중국]] 사회의 귀족은 이렇게해서 [[중화권]]에 편입된 여러 부족들의 족장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여기서 [[오등작]]의 하나인 [[후작]]을 뜻하는 글자인 侯(제후 후)가 나왔을 정도다.[* [[창(무기)|창]]을 든 무사의 모습을 묘사한 상형문자인데, 고대 사회에서 무사는 곧 귀족이었으므로 이 글자가 귀족을 뜻하는 글자가 된 것이다.] [[일본]]이나 [[한반도]]의 귀족 세력도 이렇게 탄생했다. 일본의 경우는 사무라이의 기원이며 [[아이누족]] 등의 이민족들 조상 민족인 [[에미시]]계 부족들이 [[일본 황실]]에 칭신하면서 현지의 호족으로 인정받기도 했고, 그 밖에도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의 토지들이 [[절(불교)|절]]이나 호족들에게 분봉되면서 귀족의 일부를 이루기도 했다. [[한반도]] 역시 마을의 촌장이나, [[부족]]의 족장, 속국의 군장들이 귀족 계층을 이루었다. 때문에 동북아시아에서도 귀족은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아시아|동북아시아]]는 [[유교]]의 영향으로 중화권은 귀족 계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동북아도 유목민들이나 일본, 혹은 조선 이전의 한반도 등 귀족 계급이 계속 지배하였다. 대표적으로, 유학자들은 처음부터 신분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아서 그런지 공부를 하면 천한 사람도 귀족보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런 사람을 태생적인 귀족보다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한족]] 귀족 계층은 유교의 세가 점점 강해짐에 따라 [[한나라]]까지는 성골과 비슷했다. 과거 합격 여부를 기준으로 삼은 조선의 양반과 다르게 한나라 시절에는 향거리선제를 통해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양한 모두 호족을 완벽히 제어하는데 실패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는 귀족의 전성기였다. 수당시대를 거치며 사대부 계층이 점점 강해지다가 주전충이 귀족을 학살한 사건도 있고 신사로 가는 과정인 형세호[* 양반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집안을 따지던 양반들보다도 관직, 토지나 돈을 중시하여 성공한 하류층과 인척이 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양반들은 개천용 출신이 아니면 개천용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가 떠오르면서 송나라 시대부터 혈연을 기반으로 한 귀족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더구나 이미 유학자들[* 문벌귀족이 있던 시기만 해도 과거의 위세가 약하여 집안이 안 좋은 형세호나 사대부는 관료가 되기 어려웠다.]에 의하여 시험에 통과할 능력이 없다고 공격받고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랜 귀족들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달리 유목민과 결합한 신흥 귀족들이 떠오르기 전에 대다수가 망해서 정통 후계자인 세력이 없었다.[* 점점 유교에 의해 쇠퇴하고 있었으나 [[주나라]] 시절 오등작에서 비롯된 등작이 작용하고는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반도]]에서는 [[조선]] 때까지 [[정도전]] 등이 봉화백 등을 받을 정도로 귀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명나라]]의 압력으로 귀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유목민과 그 영향에 따른 귀족들만 존재하였다. [[조선]]의 [[양반]]은 [[중국]]의 유교[* 공자가 말단 귀족의 사생아 아니면 천민이라 그런지 귀족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귀족이 사라졌지만 주로 과거 귀족이었던 사람들이 귀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나타난 계층이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력을 적게 받은 유목민들이나 일본은 근대 이전까지 계속 귀족들이 지배하였다. 동북아 귀족들이 [[유교]]보다 [[불교]]나 [[도교]]에 더 흥미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남아인 베트남조차 귀족들은 유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는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한자 문화권]]인데도 그렇다. 사실 귀족제에서는 군주의 부모라고 해도 자리를 물려주고 나면 철저히 자식인 군주에게 숙이고 신하로서 예를 다하는 경우[* 서양에서는 선왕도 그냥 공작이 될 뿐이었다. 물론 상류층의 효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귀족 신분 자체의 권위가 부모의 권위를 넘을 정도로 매우 막강했다.]가 많았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군주라고 해도 부모에게 상당히 예의를 차렸는데, 이는 한고조[* 한고조의 아버지 역시 군주에 대한 태도를 지적받은 적이 있으나 한고조가 그런 문화를 철폐했다.]나 유교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유교의 영향력이 적었던 일본의 귀족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