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광 (문단 편집) === SBS 2기-KT&G 시절 === [[파일:김동광 SBS 감독 2기.jpg]] 결국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곧바로 2004년 [[안양 KGC인삼공사|SBS 스타즈]]의 감독으로 복귀했다.자신을 도울 코치들은 SBS 프랜차이저이자 안양 성골인 [[이상범(농구)|이상범]] 코치를 유지하면서 SBS에서 연수를 보낸 김동광의 측근 중 하나인 [[김상식(농구)|김상식]] 코치를 두게 된다. 시즌 전 SBS는 전 두 시즌과 달리 상위권 후보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토종 선수로 포인트 가드 [[이정석]]을 시작으로 슈터에 쌍포 [[양희승]]과 [[김성철(농구)|김성철]]이 있었으며, 외국인 조 번과 주니어 버로 조합이 좋았다. 하지만 전자랜드와 삼성, 모비스에 연달아 지면서 개막 3연패를 한 데 이어 1라운드에서 3승 6패, 2라운드까지 7승 11패에 그치며 오히려 꼴찌로 추락했다. 지난 2년간 괴롭혔던 뒷심 부족 문제, 큰 기대를 모았던 [[이정석]]이 부상으로 1라운드를 나오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기대를 모았던 쌍포 마저 엇박자를 나타내며 시너지를 전혀 내지 못했다. 여기에 주니어 버로는 발목 기형으로 인해 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퇴출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시즌 중반 이후에는 [[양희승]]과 [[김성철(농구)|김성철]]의 쌍포, 조 번의 꾸준한 활약으로 중위권으로 올라서며 6강권 경기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1월 중순 조 번이 원주 TG 삼보와의 3차전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며 팀을 이탈했고, 무릎 내측 인대 파열로 6-8주 결장이 확정되며 시즌-아웃을 당했다. 그나마 당시 1월 이달의 선수에 선정된 [[양희승]] 포함 주니어 버로 등 토종 선수들의 분전으로 중위권은 유지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3연패를 당하며 18승 20패로 6위로 추락하며 위기를 맞이했다. 자칫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탈락할 위기였다. 그러나 번의 부상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썰렁했던 안양체육관을 매진으로 만든 [[단테 존스]]였다. || [[파일:김동광 SBS 12연승.jpg]] || || '''{{{#ffa700 2005년 3월 1일 SBS가 최다 연승 신기록[br](12연승)을 세운 뒤의 단체 사진}}}''' || 6강 언저리에 있다가 교체한 외국인 선수 [[단테 존스]]의 신들린 활약을 앞세워 15연승을 달리면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5연승 이후 마지막 홈경기에서 LG에게 패배하면서 성적은 33승 21패. 원년 시즌인 97년 이후 최고 성적에 해당된다. 15연승 당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에 크게 이기고 있던 도중 여유있게 벤치에 앉아 코치들과 웃으며 노가리를 까던 캡처 사진[*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김진(농구인)|김진]] 감독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덕에 광간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6깅 PO에서 오리온스를 가볍게 꺾었으나 4강 PO에서는 [[전주 KCC 이지스]]에게 1승 3패로 졌다. 그럼에도 김동광은 KBL 최다 연승 신기록을 세우면서 성공적인 복귀를 해냈다. 2년차를 맞이한 2005-06시즌. [[이정석]]을 트레이드로 보내는 대신 삼성 시절부터 제자나 다름이 없는 [[주희정]]을 영입하며 런앤건을 꿈꾸기 시작했다. 구단도 SBS는 매각되었고 담배회사인 KT&G로 인수되었다. 팀 명칭은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KT&G 카이츠]]였다. 외국인도 높이 보강을 위해 주니어 버로를 보내고[* 당시 기사에 의하면, 단테와 함께 재계약을 하려던 버로가 재계약에 미동적인 태도를 보이며 재계약에 실패했다는 후문이 있다.] 전자랜드에서 활약한 정통 센터로 타워 빅맨인 가이 루커를 영입했다. 특히 단테 신드롬을 일으킨 단테 존스의 2년차도 기대되었으며, 쌍포 양희승-김성철도 건재했다. 창단 이래 첫 우승, 심지어 15연승 당시의 경기력만 재현된다면 사상 첫 9할 승률 1위까지 기대했을 정도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2년차 시즌은 좋지 못했다. 양희승-김성철을 포함해 선수들의 잦은 부상이 이어졌으며, 단테 존스는 집중견제와 상대 외국인 선수들의 높아진 경쟁력 속에서 잦은 다혈질과 개인플레이로 고전했다. 여기에 주니어 버로가 나간 센터 자리의 부재도 컸다. 가이 루크-허브 래미쟈나-안토니오 키칭스 또한 버로보다 한참 아래의 기량으로 단테의 의존도를 가중시켰다. 이로인해 시즌 중반에는 9위까지 추락하면서 플레이오프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다행히 후반기에는 전력을 추스르며 단테가 예전의 폭발적인 득점력을 다시 발휘했고, 국내 선수들도 점차 정상 컨디션을 찾아가며 5라운드 부터는 다시 무서운 상승세를 타며 플레이오프 경쟁에 다시 참여했다. 그러나 3월 22일 [[대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83-98 완패를 당하며 사실상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고, 결국 5할 승률을 기록하고도 당시에는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체적으로는 높아진 다른 팀들의 수준, 잦은 부상 악재 속에서도 선전했지만 초반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해 치열한 6강 PO 경쟁 때문에 7위로 밀리면서 PO 탈락했다. [* 당시 허재의 KCC와 김진의 오리온스 그리고 신선우가 부임한 LG와 정규리그 54게임 기준 52게임까지 순위를 알 수 없었다. 결과는 KCC 5위, 오리온스 6위, KT&G 7위, LG 8위 그리고 SK는 9위였다. 그 중 LG와 SK는 우승후보로 평가받았는데 충격과도 같았다.] 문제는 이 2차 [[안양 KGC인삼공사|SBS-KT&G]] 시절은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너무 컸다는 점이었다. [[김성철(농구)|김성철]] - [[양희승]]이라는 쌍포와 [[주희정]]이라는 리딩 가드가 있었지만, 팀의 핵심은 [[단테 존스]]였고, 존스에 대한 파해법이 나오면서 성적이 하락한 격이다. 차기 시즌에도 전력보강 대신 전력유지를 했지만 그건 독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전과 달리 명백히 약체로 평가받았기 때문. 설상가상, 쌍포였던 김성철이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하며 전력이 더욱 약해졌다. 결국 양희승마저 부진에 빠지며 극단적인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더욱 심해졌고, 결국 2006-07 시즌 초반 6승 10패에 그치자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는 [[김상식(농구)|김상식]] 대행을 거쳐 [[유도훈]] 감독을 선임하면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차기 시즌이었던 2007-2008 시즌에도 정규리그 4위와 플레이오프 4강까지 돌풍이 이어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유도훈 감독마저 구단과의 불화 끝에 2008-2009 시즌 개막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자진사퇴를 하게 된다. 결국 SBS 시절부터 성골이었던 [[이상범(농구)|이상범]] 코치가 09-10 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오늘의 KGC인삼공사로 바뀐 10-11 시즌부터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는 11-12 시즌 SBS 시절부터 없었던 KBL 챔피언의 한을 푼 스페셜 원이 되었다. 물론 [[백수]]로 논 것은 아니다. [[KBL]]에서 행정 일을 보면서 귀화혼혈선수의 영입과 함께 리그 수준을 높이면서 SBS SPORTS와 방송해설로서도 코트가 아닌 야인으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2011년 [[MBC SPORTS+]] 해설위원과 2012년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복귀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삼성과 KT&G-KGC에 대한 해설은 애정을 넘어 열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삼성과 KGC에서 가장 오랜 감독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팀의 특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