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두봉 (문단 편집) === 독립운동 === 1889년 [[경상도]] 기장현 읍내면 동부동(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한학을 배우고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았다. 1908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그 와중에 계속 한글을 연구하며 <조선말본>을 집필하여 1916년 완성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를 피해 [[영국]] 화물선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했다.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고 김두봉은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여 1942년 7월 의장이 되었다. 이 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훗날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게 되는 [[최현배]]를 포함한 상당수의 어문학자들이 옥고를 겪었는데 김두봉은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하고 있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80627185108a000a200-001.gif]] || [[파일:/image/003/2009/11/16/NISI20091116_0001978773_web.jpg]] || || 1946년, 북조선 로동당 창당 대회에 참가한 김일성과 김두봉[*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일성 바로 옆의 인물. 뒤에 걸려 있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 맨왼쪽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김두봉.[*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김달현(1884)|김달현]], [[허헌]]. 1948년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 입장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958405|출처]]] || 1945년 광복이 되자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귀국하고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8월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조선로동당 총비서|위원장]]이 되었으며 소련 군정하에서 조선어 신철자법 제정에 힘썼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을 지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언어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당시 김일성, [[박헌영]] 등의 추대를 받아 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가 수반)이 되었다. 비록 국가 수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실권은 [[수상]]이자 [[조선로동당 총비서|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갖고 있던 김일성에게 있었다. 김두봉이 속해 있던 [[연안파]] 내에서도 실제 최고 실력자는 [[최창익]]이었다. 김두봉이 국가 수반 직에 오른 것은 당시 북한 정계에서 원로급에 속했고 항일운동가 및 한글학자로서 국내에 명망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