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두봉 (문단 편집) === 6.25 전쟁 === 1950년 김두봉이 김일성의 [[6.25 전쟁]] 개전에 같이 참여했는지 논란이 있다. 김일성이 박헌영과 힘을 합쳐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김두봉은 [[김원봉]]과는 다르게 "[[서울특별시|서울]]은 [[한반도]]의 심장이다. 서울만큼은 무조건 장악해야만 한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찬성했다는 의견이 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한국 전쟁 - 김두봉의 활동과 역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의 17쪽에는 6.25 전쟁 발발 후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 법적 체계상 남조선 행정 기구 등을 도입하게 하고 [[조선인민군]]의 사기 진작을 도왔다.] 6.25 전쟁 직전 평화 회담을 대한민국에 제안하는 것을 보면 침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뿐 아니라 김두봉은 연안파 북측 인물들과 끈이 있고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다. 소극적 반대를 했다고 보기에는 평화 회담 제의 뒤 6.25 전쟁 2일 전 대한민국 [[국회]]를 비방하면서 남측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6.25 전쟁 북침 주장의 밑밥을 깐 점, 6.25 전쟁 발발 즉시 북침으로 가정, 7월 4일 남한의 토지 개혁 추진과 남측 행정 기구 조직, 1951년에도 여전히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괴뢰 비방 등을 볼 때 김두봉이 반대 또는 소극적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중좌로 참전한 최태환의 회고록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어 열흘 이상 보낸 6월 23일, 사단 사령부에서는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을 소집하였다. 대부분의 군관들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참가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당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이 비밀회의를 소집하게 된다는 정보를 중앙으로부터 미리 통고받고 있었다. > >우리는 말을 타고 송악산 계곡에 임시 천막으로 만들어진 회의장으로 갔다. 우리는 길게 놓여진 탁자에 둘러 앉았다. 그러자 곧 이어 김두봉이 나타났다. 온화한 기운을 풍겨주는 인물이었다. 내뱉는 목소리도 차분하고 느릿해서 그동안 들썩거리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 했다. 그는 알고 있던 대로 학자를 연상케 했다. 번쩍거리는 금실로 수놓은 계급장을 단 다른 장군들의 면모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다. (중략) >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쯤 김두봉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금방 그의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습니다. 이제 와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남조선의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주일 안에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남조선정부가 합작,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더는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느 군관동무들은 해방전쟁의 의의를 저버리지 말고 맡은 임무에 충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두봉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군관들은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듯 했다. >---- >최태환, 박혜강, '젊은 혁명가의 초상: 인민군 장교 최태환 중좌의 한국전쟁 참전기', p.111-112. 위 내용은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 김두봉이 최태환의 부대를 방문한 상황을 회고한 것인데 '남조선 해방전쟁이 임박했으니 부대원들은 맡은 임무에 충실해주기를 바란다' 는 내용의 연설을 하면서 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만일 김두봉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으면 명색이 국가 수반이라는 인물이 한창 침공 준비 중인 전방부대까지 찾아와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침공 독려 연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아래부터는 김두봉이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예정대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제히 [[삼팔선|38도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 비상 회의를 개최해 “동지들, 매국 역적 [[이승만|리승만]]의 군대는 오늘 이른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라고 둘러대면서 휘하의 고급 당 간부들까지 속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은 줄곧 “미제와 이승만 도당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하여 조선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무력 침공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섬으로써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p.110. 여기에 의하면 김일성과 군부는 당 고위 간부들까지 속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Торкунов)의 저서인 《한국 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одов'', 2001)》[*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등 공산 세력의 남침을 소련 문서로 엮어서 보여주는 책이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는 [[정치학]] 박사이자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학장 및 [[동양학]]과 교수다.]에서 인용된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은 나오나 김두봉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김두봉보다는 [[테렌티 시티코프]]가 더 많이 나온다. 그들이 속였던 이유는 소련이 [[겨울전쟁]] 시절 같은 소련 아군에게 직접 포를 쏴서 [[핀란드]]군의 공격을 조작한 일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 교수는 6.25 전쟁 당시에도 이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박명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 지도자들인 [[강건(북한)|강건]], [[김웅(1912)|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류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 출판. 303쪽 ~ 304쪽. 이 내용을 [[구글]] 도서 검색에서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최용건을 제외하고도 전쟁에 소극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두봉이 있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서 볼때 김두봉의 입장은 '전쟁이 성공하면 좋은데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과 기대가 섞인 어정쩡한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홍순관의 증언에 따르면 최용건이 김두봉에게 만약 미군이 오면 어찌하냐고 우려를 표명했다가 리승엽에게 기회주의라고 맹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슈티코프의 보고에도 김두봉은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에 극도의 공포에 질려서 소련군이 언제 개입하느냐고 허구한날 소련인들을 붙잡고 빌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306_272_6.jpg]]|| ||휴전 협정문에 서명하는 김일성과 그를 지켜보는 김두봉. 옆에는 [[박정애]]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에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임시정부 시절 동료였던 부통령 [[이시영(정치인)|이시영]]에게 이승만이 도망쳤으니 이시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는 논리로 김일성과 (명목상의) 정상회담을 하자면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이시영은 이를 거부하고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헌법 준수를 촉구하며 김일성과 대립각을 많이 세웠으나 전체적으로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매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당지도부에는 포함이 되었으나 김일성은 김두봉이 비조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계속하여 비판하였다. 무력감 때문에 김두봉은 소련측에 전쟁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사퇴했을 것이라고 자괴감을 토로하였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