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한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시절부터 4번타자 겸 투수로 활약하였다. 1학년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5번타자 겸 3루수로 뛰었고 특히 그의 활약상은 2학년이던 1976년에 빛났는데, 동갑이자 1년 선배였던 [[김용남(야구)|김용남]]과 함께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견인함은 물론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투수와 유격수를 소화하며 팀의 준결승 진출에 기여하였고 가을에 열린 우수고교 초청 야구대회에서는 고교야구 3대 투수 중 하나였던 [[김시진]]과 맞붙기도 했다. 그러나 하필 같은 팀의 김용남이 고교 3대 투수로 꼽히던 스타였기 때문에 정작 스포트라이트는 김용남이 다 받았다. 4번타자 투수 김성한도 이름값은 높았고 어디 가서든 에이스 자리는 꿰찰 만한 능력이었지만, 같은 팀에 김용남이 있고 그의 라이벌이 [[최동원]], [[김시진]]이었으니 자연스레 관심에서 비껴나 조력자 포지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해 군산상고가 김성한이 투타 및 수비[* 김성한은 투수로 출장하지 않을 때는 내야수로 출장했다. 이 때 유격수로도 출전하고 했던 경험이 프로 초기 반쯤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야구)|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기용되는 데 공헌하기도...] 전반에서 활약해줬기에 호성적을 낼 수 있었음은 이견이 없다. 당시 김용남과 김성한이 있는 군산상고의 마운드는 76년도 고교야구 뉴스 하면 꼭 나올 정도로 위력적이었고, 타자로서의 기여도까지 합하면 김성한은 군산상고에서 제일 가치있던 선수였다. 이후 3학년 때도 한일간 고교야구 대회에 선발되는 등 활약을 펼치며 [[동국대학교 야구부|동국대]]에 진학했다.[* 동갑내기 [[이만수]]와 비슷한 케이스로 중학교 시절 유급한 바 있어 78학번으로 입학하였다. 김성한의 경우는 중학교 때 방황으로 1년 유급하게 되었다고.] 동국대에서도 3~4번타자로 주로 출장하며 투타 양면에서 고른 활약을 보였지만 팔꿈치 부상 등으로 인해 2학년부터는 투수로서의 출장이 점점 줄고 우익수나 지명타자로 나오는 경기가 늘기 시작했다. 3학년 때까지는 그래도 투수로 등판하는 경기가 종종 있었으나 4학년 때는 투수 등판이 거의 없어 한미간 대학야구전 대표팀에 외야수로 선발되었을 정도였다. 이후 졸업을 앞두고 [[한일은행 야구단]]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막 창설된 프로를 선택,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