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민심서 (문단 편집) == 여담 == * 한때 [[북베트남]]의 국가주석이었던 [[호찌민]]이 즐겨 읽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2006년 연합뉴스에서 호찌민 박물관을 방문하여 문의한 결과 [[호찌민]]의 유품 중에는 목민심서가 없으며 현지에서도 금시 초문이라는 사실을 밝혀 '''허구'''임이 드러났다. [[박헌영]]이 호찌민에게 선물한 사실은 있다고 《[[박헌영]] 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에서 소개했지만 사료상으로 근거가 없는 게 기록으로 볼 때 [[모스크바]]에 [[박헌영]]과 [[호찌민]]이 있던 시기는 겹치지 않고 [[https://www.yna.co.kr/view/AKR20191206146100502|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박헌영 평전》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이 때문에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근거 없이 호찌민 애독설을 소개한 것에 대하여 사과했다. * 손석춘 교수가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과의 인터뷰를 쓴 《박헌영 트라우마》에도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줬다는 거짓 정보가 나온다. 《박헌영 평전》이 《박헌영 트라우마》보다 유명해서 저자인 안재성만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원경스님의 인터뷰를 그대로 쓴 손석춘 저서에도 이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틀린 정보의 출처는 원경스님일 것이다. >박헌영과 호찌민은 각별히 친밀했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민중을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가를 서술한 이 책은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 >손석춘, 박헌영 트라우마 *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는 검단선사의 비결이 들어 있어서 이것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후에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이 비결을 빼내갔는데 그것이 바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 전설이 있다. * [[전두환]]도 이 책의 위세를 입어보고자 하여 순방 시 전용기 집무실에 목민심서를 놓아두고 언론에게 보도지침으로 "집무실 안에 목민심서가 눈에 띈다"라는 낯간지러운 기사를 쓰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전두환]]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을 필두로 국제 무대 외교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과 필사적으로 경쟁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최대한 우방국을 많이 만들려는 시도였다.] * 번역 과정이 매우 오래 걸리고 어려웠다고 한다. 국사학·국문학·한문학·동양사학·경제사학·사회학 등을 전공한 [[https://news.joins.com/article/23112449|16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10년이나 걸렸다고.]] 특히나 [[강희자전]]에도 안 나오는 [[벽자]]들이 난무하고 있는 데다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책에서 조선 지방자치 제도를 다루면서도 아주 어려운 문학적 수사를 사용하고, 옛 문헌 인용을 많이 했고, 따라서 번역자들은 이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책 내용에서 다루는 조선 법제와 정치사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했다고 한다. *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부정되는 호치민 애독서라는 소문에 대해 [[역사학자]] [[임용한]]은 과거부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책의 한문 난이도는 한학을 배운 정도가 아니라 당대 석학급이나 가능하다고. 정확하게 말해서 목민심서의 수준은 정약용이 책을 쓸 때 독자층으로 여긴 조선시대 목민관조차 대다수는 읽을 수 없는 정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시대 지방수령들은 무관이나 [[음서]]직들도 상당했고 문과 급제 출신 수령도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읽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 2010년 12월 [[호남대학교]] 최병현 교수가 10년에 걸친 목민심서 영어 번역을 끝냈다. 그리고 이 영역본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출판된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328983|#]] * [[북한]]에서는 이 책이 한때 [[금서]]였다. 이유는 북한 내 계파 투쟁과 연관되어 있다. 북한 정권 내 계파 중 [[갑산파]]는 전통 문화 및 사상을 새롭게 발굴하는 작업을 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약용의 저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런데 [[김일성]]이 [[갑산파 숙청 사건|갑산파를 비롯한 다른 계파들을 숙청하면서]] 이 갑산파의 연구 작업도 중단시켰고 목민심서까지 금서로 지정해 버린 것. 1980년대 이후에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재개되면서 목민심서도 제한적으로나마 금서에서 풀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