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바르스 (문단 편집) === 술탄의 맘루크 === 1250년, 제7차 [[십자군]] 원정 시의 [[십자군 전쟁#s-6.9|만스라 전투]]에서 술탄의 친위대장으로 참전하여 카페왕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를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전후, 전쟁 중 병사한 앗 살리흐의 후계자 알 투란샤가 바흐리 맘루크를 홀대하고 배척하자, 선왕 앗 살리흐의 두 번째 아내였던 [[샤자르 알 두르]]와 결탁하여 술탄 알 투란샤를 죽이고, 샤쟈르 알 두르를 술탄으로 추대해 [[맘루크 왕조]]를 시작했다. 맘루크 왕조의 제2대 술탄은 샤쟈르 알 두르의 재혼 상대이자 맘루크 지휘관이었던 아이바크였다. 바이바르스는 술탄 아이바크 밑에서 시리아 지역에 남은 아이유브 왕조의 군주 나스르와 대립했다. 하지만 아이바크는 바이바르스와 바흐리들이 자신이 아닌 샤쟈르에게 충성하는 것에 불안을 느껴 자신의 사병 맘루크를 양성해 바이바르스를 공격했다. 바이바르스는 결국 쫓겨나 [[아이유브 왕조]]의 나스르(An Nasir Yusuf)를 찾아가 의탁했다.[* 당시 이집트를 제외한 시리아의 [[알레포]],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등은 아직 [[아이유브 왕조]] 술탄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얼마 후 몽골에 쓸리지만...] 한편 바그다드의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몽골의 침략 앞에 무슬림의 단결을 호소하며 중재했고, 아이바크는 나스르가 바이바르스를 지원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하여 받아들였다. 바이바르스는 다시 쫓겨나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바이바르스와 바흐리들의 고통을 보던 샤쟈르는 결국, 남편 아이바크를 목욕중에 암살했다. 하지만 아이바크의 맘루크 지도자 [[쿠투즈]]가 수상함을 느끼고, 시종들을 고문하여 사건의 진실을 알아낸 다음 주군인 아이바크의 아들 알 만수르 알리를 술탄에 앉히고 샤자르 알 두르를 체포해 탑에 감금한 뒤 살해했다. [[호라즘 왕조|호라즘]] 왕족이었던 쿠투즈는 어린 술탄 알리의 섭정을 하다가 곧 자신이 술탄에 올랐다. 한편, 바그다드가 몽골군에게 함락되자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의 나스르는 바이바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바이바르스는 나스르와 함께 몽골군을 맞이하려 했으나 나스르가 항전과 항복 사이에서 고민을 계속하자 단념하고 이집트의 쿠투즈에게 향했다. 이때, 바이바르스와 그의 바흐리 맘루크들은 명색이 [[살라흐 앗 딘 유수프|살라딘]]의 혈통을 물려받은 시라아의 술탄인 나스르의 행보에 매우 실망하며 [[암살]]시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일이 글렀음을(...) 예상한 바이바르스는 그의 재산과 가족들을 이집트로 미리 피신시켰다. 이후 나스르는 알레포를 잃고 [[나블루스]]에서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가자 지구|가자]]에서 아들과 함께 [[훌라구]]에게 생포되었다. 그러나 나스르는 아인 잘루트 전투 패배소식을 들어 빡친 훌라구에게 곧 처형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