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바르스 (문단 편집) === 몽골에 맞선 술탄 === [[파일:예루살렘 사자문.jpg]] 바이바르스는 영토 곳곳에 자신의 상징인 표범 무늬를 새겼다. 사진은 [[예루살렘]] 사자의 문.[* 그외에도 [[크락 데 슈발리에]], [[바니아스]]의 님로드 / 수베이바 성채, 롯의 다리 등에 남아있다] 1260년에 몽골군이 육박하자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와 손을 잡고 9월 3일의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대파, 사령관 키트부카까지 전사시키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바이바르스가 몽골을 막아낸 건, 온전히 그의 공만은 아니다. 그가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공을 세운 건 맞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 자체는 바이바르스의 전임 술탄인 쿠투즈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이집트로 개선하는 도중에 바이바르스는 술탄 쿠투즈를 살해하는데, 이는 이전에 쿠투즈가 바이바르스의 군단장이었던 아크다이를 살해하였던 데에 대한 보복이자, 쿠투즈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데에 대한 선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대신하여 카이로로 돌아와, 술탄에 즉위한다. 1271년에는 십자군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히던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함락했다. 몇 차례 공성전을 펼쳤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바이바르스는 보에몽 백작의 편지로 가장한 가짜 항복 명령서를 만들어 [[비둘기]]를 이용해 성에 날려보냈다. 성을 지키던 [[구호기사단]]은 느닷없는 항복 명령에 이것이 바이바르스의 속임수라는 것을 간파했으나, 전황이 악화되고 기사단의 상황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어[* 크라크 데 슈발리에 인근 지역과 요새가 모두 함락당해 더 버텨본다고 한들 그저 죽을 날이 하루 뒤로 늦추어지는 꼴 밖에 안되었다.] 협상을 통해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넘기고 모두 철수한다. 1277년 봄에 [[아나톨리아]]의 몽골군을 격파하고 [[일 칸국]]의 [[아바카 칸]]과 대결하고자 하였으나, 아바카 칸은 이를 피하고 도주한다. 바이바르스는 그를 쫓지 않고 다마스쿠스에 개선하게 되는데, 이 직후에 복통을 일으키고 약 2주 후인 7월 1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이라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정적을 독살하려고 준비한 독주를 실수로 자신이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도한 음주[* 말젖술(馬乳酎)였다고 한다.]가 원인이라는 설도 있어, 정확한 원인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30회 이상을 출병하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