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바르스 (문단 편집) == 의의 == [[이집트]]로 몰려오는 십자군들을 격파하고[* 단 3차 이후 십자군 원정은 크게 약화되었다. 군사적인 부분은 물론 보급문제까지.] [[일 칸국]]의 [[아바카 칸]]의 군대를 물리쳐 [[몽골제국군]]의 서진을 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바이바르스는 세계사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몽골군 본진이 아니라 파견된 군대 정도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칸의 권위가 강렬하던 칭기스칸 생전의 서하와 호라즘을 제외하고는 애초에 몽골은 본국의 군대라는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남송을 멸망시킨건 쿠빌라이,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킨건 훌라구,러시아 대공을 조세수금원으로 쓴건 킵차크 칸국이었는데 이들은 대칸의 권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연합할 수 없는 지방정권세력이었고 징기스칸 사후 바로 대립하기 시작하여 내전까지 펼치면서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몽골군은 애저녁에 공세종말점을 한참 넘어가 있었다. 몽골 본국에서 이집트까지 걸어서 십년이 넘게 걸리는 지역인데 여기까지 국가를 운영한다는게 중세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전쟁을 펼치는 군대에 보급을 해주고 전사자가 생기면 병력을 보충해줘야하는데 그게 이미 불가능해진지가 한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보급을 현지에서 하고 대충 용병과 현지인들을 화살받이로 쓰는 영리한 병력교환을 통해 거의 소모없이 무패로 확장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한번만 막아줘서 병력을 괴멸시키면 확장이 끝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아무도 막지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막아낸 사람이 바이바르스라는건 명백하다. 아바카 칸이 본격적으로 시리아를 침공한 1281년에는 바이바르스는 죽고 없었는데, 이때도 맘루크는 이들의 진격을 막아냈고 이후 일 칸국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일 칸국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계속 맘루크 왕조와 치고 받았고, 한때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분견대가 가지 지구까지 쳐들어갈 만큼 맘루크 왕조를 위협하다가[[https://cafe.daum.net/shogun/9xm/9339|#]] 끝내 1303년 4월 20일 마르즈 알 사파르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더 이상 맘루크 왕조에 대한 공략을 포기하였다.[[https://cafe.daum.net/shogun/9xm/9340|#]]] 한편으로는 [[킵차크 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이슬람]]을 [[몽골인]]들에게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몽골 제국의 분열(일 칸국 vs 킵차크 칸국)을 이용하는 이이제이 외교를 구사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일 칸국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십자군 (특히 안티오크 공국), 아르메니아 왕국, 동로마 제국, 교황령 등의 기독교권과 동맹을 시도했는데]]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맘루크 군과 마찬가지로 기병이 주력이던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던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연결되는 전령 시스템(역전제)과 문화진흥에 관심이 많았다. 이 역참제(하리드 혹은 바리드[* 국경 도시인 알 비라와 알 라흐바의 합성어라고도 함])는 바이바르스의 역작으로, 유민족 통합과 정보의 신속한 전달에 이바지했다. 이는 몽골의 잠치에서 영향 받았다고도 하는데 세 가지로 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파발로, 평상시에는 다마스쿠스 ~ 카이로 간의 연락 4일 걸리고 비상시에는 3일로 줄어들게 된다. 두번째로 마나위르라 불리는 봉화대이다. 이는 알 비라와 알 라흐바에서 각각 시작되어 다마스쿠스에서 합쳐지고 가자까지 이어진다. 그럼 그곳에서 파발마 혹은 비둘기로 카이로에 알리는 체계이다. 마나위르 덕분에 아침 무렵 변경의 급보가 저녁 무렵 카이로 당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은 아이유브 왕조 때부터 크게 활용되던 비둘기 서신 전달인데, 기존에 개인별로 쓰이던 것을 국가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바리드 시스템은 지극히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으며, 몽골군의 기동성에 대항하려는 맘루크 측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파괴적인 이미지와 달리 바이바르스는 여러 성채들의 요새화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선 몽굴군에 의해 방어 시설이 파괴된 [[신자르]], [[보스라]], 알 준, 사르카드, [[샤이자르]], 알 살트, 알 수바이바, 슈마이미쉬 (홈스 부근) 등을 재건하였고 십자군으로부터 빼앗은 [[크락 데 슈발리에]], 알 준, 티룬, 히신 아르카드, 사파드 성채 등을 보강하였다. 그 밖에 십자군 견제 목적으로 내륙에 카쿤 등의 성채를 사실상 새로 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파괴된 아르수프와 [[카이사레아]]를 대신하여 해당 지역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그 외에 높은 성벽의 위세는 맘루크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아이유브 시대에 몇개의 도시들에 집중된 시리아의 권력이 이집트에 반기를 들었던 것을 의식한 바이바르스가 [[디바이드 앤 룰|일부러 많은 성채들에 군대를 분산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어쨋든 현재 남아있는 레반트 지역의 성채들 중 상당수는 바이바르스의 손을 거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