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바르스 (문단 편집) == 성격과 평가 == 바이바르스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깊은 신앙심과 금욕적인 성격에, 부하를 지극히 아끼는 등 이상적인 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세계를 일곱 바퀴나 돈 사나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매사에 열정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교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정한 정치가였다. 기독교도에게 맹목적인 증오를 드러냈고, 학살을 벌이다가도 필요하면 협정을 맺고 다시 통수를 치곤 했다. 용맹한 사자 같다가도 꾀많은 여우 같기도 한 바이바르스의 실리적인 면모는, 아직 낭만적인 영웅주의적 정치관에서 깨어나지 못한 유럽인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이 거의 무너졌고[* 4차 십자군의 약탈이 있었던 1204년부터 니케아 제국이 수도를 회복한 1261년까지 동로마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서유럽은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하지만 부작용도 꽤 있어서 계속되는 적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전투 전에 한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는 잔인한 면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부분은 몽골군도 비슷했다. 사실 맘루크 군대나 몽골군이나 모두 유목민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여 거의 비슷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268년의 [[안티오크]] 파괴로, 고대부터 유서 깊은 도시였던 안티오크는 바이바르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수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는 빼도 박도 못하는 [[병크]]로, '''투항한다면 주민들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라 더욱 비난받고 있다.[* 1차 십자군 때의 유럽인들이 저지른 학살 행위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바이바르스의 안티오크 파괴는 십자군 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단일 학살 행위로 평가받는다.] 외교 면에서도 몽골군과의 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등 위태위태한 행보를 보이며 사방에 적을 만들었다. 훌라구가 대칸의 후계 문제로 주력군을 후방으로 빼고, 이후 [[일 칸국]]이 [[킵차크 칸국]]과 지속적으로 심각한 분쟁을[* 일 칸국과 킵차크 칸국의 대립은 상속 제도로 인한 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네스토리우스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인 차이까지 겹쳐 아예 맘루크와 킵차크 칸국이 동맹을 맺을 만큼 심각하게 돌아갔다.] 겪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출신이면서도 맘루크 왕조 군대의 중추인 맘루크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당시 시대적으로 몽골의 억압을 피해 튀르크 인들이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방면으로 밀려드는 때여서 훈련도 필요하지 않은 숙련된 군인을 구하는게 상대적으로 쉬웠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병인 맘루크들의 훈련에 있어 푸루시야 (군마 소유)를 중시 여겼던 바이바르스는 수도 카이로에 2개의 히드포룸 (알 마이단)을 지어 훈련을 용이하게 하였다. (각각 알 자히리, 알 카바크) 특히 1267년에 지어진 후자에선 술탄 직속 군대의 주 훈련장이었으며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 머무는 한 매일 이 곳을 방문하여 직접 솔선수범해 병사들과 함께 저녁 예배를 알리는 아잔이 울려퍼질 때까지 훈련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시리아에서의 군사 원정 중에도 이런 훈련은 매일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술탄이 모범을 보이자 휘하 아미르들도 활과 창을 쥐고 병사들과 굴렀으며, 이로써 맘루크 군대는 더욱더 강력해졌다. 다만 바이바르스가 사망한 후 이러한 지독한 훈련 풍토는 점차 쇠락했는데, 그나마 칼라운과 그 아들들인 칼릴 및 무함마드가 이를 유지시키려 노력하였다. 훈련과 함께 바이바르스는 군대 및 방어 태세에 대한 점검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리아 같은 외지에는 아미르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수도인 카이로에서만큼은 직접 병사들을 점검하였다. 일정을 미리 통보하고 병사들을 소집시켜 군사적으로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점검했는데 이에 불참했을 때는 최대 사형까지 집행할 만큼 매우 엄격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엄격한 사열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라 1276년 홈스에서 점검에 불참한 5명의 할카[* 맘루크 아랫 단계의 군사 집단으로 주로 튀르크계로 이루어져있다.] 군인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이슬람권역의 국방부라고 할 수 있는 아르드의 감독 하에 관리되었다. 또한 바이바르스 본인은 몽골군을 상대로 여러 번 전투를 벌여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몽골군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한 예로 1277년 4월 15일 룸의 셀주크 술탄국에서 벌어진 엘비스탄 전투에서 바이바르스가 지휘하는 맘루크 군대가 몽골군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바르스는 축제 자리에서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 내 군대의 기병 1만 명이 몽골군 3만 명을 만나면 그들을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고작) 7천 명의 몽골군을 만났다. 몽골군은 나의 모든 군대에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내 군대는 낙심했다. 몽골군은 무슬림 군대의 좌측을 쳐부수었다.[* 이후 맘루크 군대와 싸울 때에도 몽골군들은 집요하게 맘루크 군대의 좌측을 공격하여 맘루크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신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들은 우리를 이겼을 것이다.[[https://cafe.daum.net/shogun/9xm/9336|#]]"[* 혹은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 이전에 나와 내 하인들이 몽골인들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군대의 왼쪽 측면이 그들에게 무너졌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도왔다."라고도 한다.] 고양이를 유독 좋아한것으로도 유명하다. 카이로에 고양이 정원을 따로 마련했을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