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지성 (문단 편집) == 행적 요약 ==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관악구]] [[신림동]]에 정착한 부모와 살았으나 태어난 지 몇 년 안 돼 아버지의 사정으로 부친의 고향인 [[전라남도|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 775번지에서 자랐다. 그러다 초등학교[* 박지성이 다녔던 신안초등학교는 점암초등학교의 분교장으로 강등되었다가 2019년에 폐교되었다.] 3학년 때 [[수원시]]로 이사하여 수원 [[산남초등학교(경기)|산남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나[[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60620/8320433/1|#]] 축구부 해체로 이후 [[세류초등학교]]로 전학갔다. 이후 [[안용중학교]], [[수원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99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했고 명지대 2학년 재학 중이던 2000년 일본의 [[교토 퍼플 상가]]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입단 후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박지성은 2000년 4월 5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후 한동안 주전과 비주전을 오갔지만 [[히딩크호]]의 황금세대 중 한 명으로 활약하면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전 후반 70분 극적인 결승골을 성공시켜 1:0 승리를 견인하는 등 '''2002년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고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준우승국 프랑스를 상대로 후반 81분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을 패배 직전에서 구하고 프랑스에 무승부 승점 1점을 획득하고 토고전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면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원정 첫승'''이라는 기록을 새로 썼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본선이 열리기 직전 한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의 평생 꿈[* [[https://sports.donga.com/sports/article/all/20100308/26707271/3|관련기사]]]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라며 당찬 포부를 천명했고, 이후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출전하면서 대회 32강 조별리그 본선 첫 경기 그리스전에서 쐐기골을 기록하는 등 자신의 평생 꿈이라고 밝혔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이루어냈다.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만해도 월드컵 역사상 조별리그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축구 불모지의 변방의 작은 아시아 국가[* [[https://www.google.co.kr/am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6/05/2002060570115.html%3foutputType=amp|출처]]]가 월드컵 4강(최종 4위), 원정 첫 승(최종 17위), 원정 16강(최종 15위)이라는 상상만 했던, 아니 어쩌면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기적을 내리 써내려 갔고, 이러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라 불린 이 시기, 그 역사의 중심에는 단연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있었다. 박지성이 현역 은퇴를 결정한 2014년 여름 기준으로,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거둔 5번의 승전에 모두 출장한 선수가 박지성이었다!''' 3개의 [[FIFA 월드컵]] 본선에서 모두 1골씩 득점하여 3연속 골을 기록한 아시아 최초의 선수이며, [[FIFA 월드컵]] Man of the Match 총 4회로써 [[FIFA 월드컵|월드컵]] 역대 공동 7위이자 아시아 대륙 역대 최다 수상[* 2002년 포르투갈, 2006년 프랑스, 2010년 그리스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선정되었으며 [[혼다 케이스케]]와 공동 1위 기록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FIFA_World_Cup_awards#Man_of_the_Match|랭킹]]]의 기록을 갖고 있고, [[대한민국]] 역대 [[FIFA 월드컵]] 본선 최다 승리[* 5승. 02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은 승부차기 승리이기 때문에 전적상으로 무승부다.]와 본선 최다 득점[* 3골로 [[안정환]], [[손흥민]]과 타이 기록.]기록 등의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 아시아와 대한민국 축구를 빛낸 전설적인 축구 선수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들을 이룩한 박지성을 두고 [[차범근]]은 "대한민국 축구사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라고 평가했다.[*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382/0000890542|출처]]]2008년 10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년 3개월 동안 대표팀 주장을 역임했으나 A매치 100번째 경기에 출장한 직후 만 29세의 나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또한 [[히딩크호]] 23인 엔트리에선 [[차두리]]와 더불어 2002 월드컵 당시까지 K리그에 소속된 적이 없는 단 2명뿐인 멤버다. 다만 [[차두리]]는 10년 넘게 지난 뒤 [[FC 서울]]에 입단하여 2골을 넣었다. 따라서 히딩크호 선수 중 유일하게 K리그 출장경력이 없는 선수이기도 하다. 클럽 경력은 일본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한 이후 일본 1, 2부 리그에서 활약했다. 이후 월드컵을 거치며 [[거스 히딩크]] 전 감독에게 발탁되어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로 이적했다. 네덜란드 시절 초기에는 부진과 리그 부적응이 겹쳐 부상 재활보다도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오죽하면 홈팬들마저 자기가 출장하면 야유를 보낼 정도라 히딩크 감독이 원정경기에서만 출전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갈까도 수차례 생각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고 다짐하면서 하나하나 다시 쌓아올렸다고 하며 이후 부진을 극복하자 홈팬들부터 환영했다고 한다.]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곧 리그에 적응하고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팀의 리그 우승과 챔스 4강 달성에 기여한 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끌던 EPL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게 된다. Three Lungs Park[* 세 개의 폐], 빅게임 플레이어, 두 개의 심장, 아스날 킬러 등으로 불리며 자신의 축구 인생 전성기의 대부분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전성기 중 한 시기에 보태며 구단의 수 많은 우승에 일조했고, 이후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와 [[PSV 에인트호번]]을 거치며 2014년 5월 14일 공식 은퇴를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 1호 박지성(2005, 맨유 이적), 2호 [[이영표]](2005, 토트넘 이적), 3호 [[설기현]](2006, 레딩 승격 이적), 4호 [[이동국]](2007, 미들스보로 이적), 5호 [[김두현]](2009, WBA 승격), 6호 [[조원희]](2009, 위건 이적), 7호 [[이청용]](2009, 볼턴 이적), 8호 [[지동원]](2011, 선더랜드 이적), 9호 [[박주영]](2011, 아스날 이적), 10호 [[기성용]](2012, 스완지 이적), 11호 [[김보경(축구선수)|김보경]](2013, 카디프 승격), 12호 [[윤석영]] (2013, 퀸즈 파크 레인저스 이적), 13호 [[손흥민]] (2015, 토트넘 이적), 14호 [[황희찬]] (2021, 울버햄튼 이적). 참고로 설기현이 2004년 오프시즌에 [[RSC 안데를레흐트]]에서 [[풋볼 리그 챔피언십|디비전1]]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로 이적하여 잉글랜드 리그에서 먼저 뛰긴 했으나, 승격은 레딩으로 이적하면서 하게 된다.]이자, [[프리미어 리그]] 주장을 역임한 최초의 아시아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http://m.newsshare.co.kr/31524|관련기사]]]이며,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이자 최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 2006-07, 2007-08, 2008-09, 2010-11]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출전[* 2008-09, 2010-11],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7-08]과 [[FIFA 클럽 월드컵]][* 2007-08]우승을 한 선수이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UEFA 클럽 풋볼 어워드#s-2.5|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 2004-05 시즌 [[호나우지뉴]], [[안드리 셰브첸코]], [[아드리아누]], [[사무엘 에투]]와 함께 [[UEFA 클럽 풋볼 어워드#s-2.5|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 5인에 선정되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하게 [[UEFA 클럽 풋볼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상자는 호나우지뉴.[[https://archive.ph/20120711095914/http://en.archive.uefa.com/competitions/SuperCup/news/Kind=536870912/newsId=318946.html|#]][[https://web.archive.org/web/20080513070849/http://www.uefa.com/competitions/supercup/news/kind=1/newsid=323098.html|#]]]와 [[UEFA 올해의 팀]] 후보[* UEFA 올해의 팀 후보 55인에 든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그 중 왼쪽 미드필더 부문 5인에 올랐으며 투표 결과는 수상자 [[파벨 네드베드]] (29.10%)와 [[아르연 로번]] (27.94%)에 이은 3위 (22.61%)였다. 베스트 11으로 팀을 나눌 때 3군에 들어간 셈이다.[[https://www.uefa.com/newsfiles/380316.pdf|#]]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m.aspx?CNTN_CD=A0000305181#cb|#]] 미국스포츠식 개념으로 치면 UEFA 서드팀에 들어갈 성적이었던 것.]로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후보 50인에도 선정된 축구 선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