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해 (문단 편집) == 사회 구조 == 발해의 사회구조는 흔히 소수의 고구려 지배층과 다수의 말갈 피지배층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이유로는 발해 지배층 중에 모시몽, 오차지몽, 미발계 등 말갈계 또한 있었던 기록이 남아 있고, 발해가 차지한 영토는 애시당초 고구려인들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며 고구려 멸망 후 해당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들이 [[민족 대이동]] 수준으로 모두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 후기의 인구는 무려 12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넓은 땅을 모두 벗어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발해의 사회구조는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혼재된 구조는 맞으나 소수의 고구려계 지배층, 다수의 말갈계 피지배층은 아니다. 발해의 귀족은 왕족인 대씨(大氏)를 중심으로 고씨(高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두씨(竇氏), 오씨(烏氏), 이씨(李氏)의 여섯 [[우성망족]](右姓望族)이라 불리는 유력 귀족집단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발해가 존재한 대부분의 기간동안 외교, 군사, 정치 주도권을 잡았고, 이 중 고씨, 오씨는 발해 멸망 후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고, 장, 이는 고구려계로, 오, 양은 말갈계로 추정되지만 두씨는 기록이 미비하여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하(賀), 왕(王), 임(任), 해(解),수(受), 율(聿), 배(裵), 박(朴), 최(崔) 등 부여계, 고구려계, 말갈계를 비롯한 중국계, 신라계도 포함된 49개 족성(일반귀족)이 존재하였다. 왕비족으로는 기록이 부재하여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간왕]]의 왕후인 [[순목황후]]의 성씨인 태씨(泰氏)가 존재하며 무왕 시기 등장하는 [[임아]]가 왕의 장인이 맞다면 임씨(任氏)또한 왕비족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편호(編戶)는 국가호적에 편입된 평민으로 신분이 보장되었으며 나름대로 자유로운 삶은 영위하였고 평민들은 농민이 주가 되었으며 이들은 부세와 요역, 병역 등을 감당하였다.<<구당서 발해전>> 천민계층으로는 부곡민과 노비가 존재하였으며 부곡(部曲)민들은 신분이 자유롭지 못한 계층으로서 그 신분이 편호보다 낮고 노예보다는 좀 높았으나 주인과의 예속관계가 비교적 강한 농노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노비는 가장 신분이 낮고 착취와 압박을 가장 심하게 받았다. <<송막기문 발해국>> 옆나라 신라의 [[골품제]]처럼 공고한 [[신분제]]가 발해에도 있었는지는 기록의 부족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정도를 떠나서 전체적인 양상은 동시대 신라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인명들을 대조해 보면 발해 역시 대씨가 고위 관료 대부분을 독점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최상위에서 한 단계 아래 급 벼슬에 여섯 우성망족이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발해에서도 자체 [[과거시험]]이 따로 없었으므로 [[당나라]] [[빈공과]]를 노리는 유학생을 많이 보냈는데,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을 참고하면 정작 유학생은 조효명, 유보준, 해초경 같은 비주류 성씨를 가진 인명이 상대적으로 많이 확인된다. 신라에서도 주로 최고 신분에서 한두 단계 아래면서도 유학생을 뒷바라지할 재력은 있는 [[6두품]] 계급이 [[당나라]] 유학을 주로 떠난 것처럼, 발해에서도 대략 그 정도 가문들이 본국에서의 가문의 한계를 당나라 유학 경력으로 보완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