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해 (문단 편집) == [[발해/지리|지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발해/지리)] >初, 黑水西北又有思慕部, 益北行十日得郡利部, 東北行十日得窟說部, 亦號屈設, 稍東南行十日得莫曳皆部, 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 其地南距渤海, 北·東際於海, 西抵室韋…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 不復與王會矣. >당초 흑수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고, 북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일로 가면 굴설부(窟設部)가 있다. (굴설은) 굴설(屈設)이라고도 한다. 조금 동남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열(拂涅)·우루(虞婁)·월희(越喜)·철리(鐵利)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후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하여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발해의 여러가지 지도. 자연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대륙 중앙에 위치한 발해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있었지만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현대 발해사 연구와 얽혀있는 한(남북)중일러 각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만 봐도 발해 연구사 초기에는 연해주 - 아무르강 하류 북만주와 겹치는 발해의 동북방 영역을 넓게 인식했으나 근래에 들어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에 러시아 국민으로 편입된 연해주 - 시베리아 지역 원주민들의 역사를 발해보다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꼭 러시아만 그런게 아니라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는 중국, 자신들의 만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연구했던 일본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발해/IE001206652_STD.png|width=100%]]}}}|| 위의 지도는 중국 학계의 지도이다. 의외로 중국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넓게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의 동북이 러시아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지도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가 발해를 당의 도독부 정도로 보아서(…)이다. 중국은 어차피 발해를 말갈과 동류로 인식하며 말갈이 러시아 방면까지 넓게 퍼젔으니 발해도 [[도긴개긴]]이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저런 지도가 일본의 주류는 아니고, 일본에서는 주로 아래 지도에서 요동과 서북한을 제외한 지도가 주류이다. 일본의 교과서나 역사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대체적으로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의 발해 항목에는 한국어도 병기되어 있다. 일제 시절에는 만선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로 보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발해/22-0440265_1.jpg|width=100%]]}}}|| 한국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지도. 왠지 대부분의 경우 발해의 북쪽 국경을 랴오허강, 쑹화강으로 삼는다. 일부는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발해와 관련된 자료들 중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는 발해가 평양 점유에 실패했다고 적은 반면 [[유득공]]의 [[발해고]]는 평양 일대를 발해가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옛 기록에서부터 발해는 평양 정복 관련 의견이 갈렸고 그 이전의 1차 사료들도 하나같이 시원하게 발해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말해주는 기록이 없다보니 추정으로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단, 평양을 중국 강역에 넣으려는 억지 시도와는 별개로 평양이라는 도시 그 자체의 국적에 대해서는 한국학계에서도 의견이 대립한다. 과거에는 나당 양국의 대동강~원산만 협약을 기준으로 대동강 이남의 평양(낙랑 치소)은 신라령, 이북(평양성)은 발해령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평양과 평안남도 남부 대부분이 발해보다는 신라 영향권에 가까웠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8~9세기 양국의 국경 획정은 한국사학계에서도 상당히 중대한 문제로 평양 일대가 신라령이라는 판단이 확정된다면 남북국시대 지도(특히 교과서 수록 지도)를 통째로 수정해야 할 판이다. 문헌사료적으로는 조선시대에 발해와 관련된 자료들 중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는 발해가 평양 점유에 실패했고 평양은 신라가 점유했다고 적은 반면 [[유득공]]의 [[발해고]]는 평양 일대는 발해영토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서 모두 남북국시대로부터 대략 800여년이나 지난 후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다. 그나마 당대의 기록에 근접했을 고려사에서는 신라가 평양을 점유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신라의 점유가 매우 느슨한 형태였는지 평양이 황폐화되었다는 기록 역시 적혀있다.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의 지위와 국적에 대해서는 [[평양시/역사]] 항목으로. 한국 측은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를 위시하여 발해의 요동 지배를 확실시 한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단정지어 버리면 왜 신라군과 당군의 진격이 막혔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으며 남쪽으로 발해가 위치한다는 것은 요동지배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 학계에서는 발해의 요동 점유 문제에 대해 다소 신중히 접근하는데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요동과 평안도 지역에 고고학적 유적을 거의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 현종 시기 나당 연합군의 발해공격에 대한 논란은 제외하고서도 곧 이어서 당나라가 안사의 난이라는 내란, 그리고 각 지방 번진들의 난립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영역이 줄어들었기에 서북한지역과 요동지역에서의 발해의 영역 여부는 정말 정복했거나 아니면 최소 영향권 안으로 가져온 것은 명백해 보인다. 당의 북동 지역 번진이였던 '''평로'''가 안사의 난 중에 산동으로 이동하였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의 확실하게 생각된다. 특히 요동 지역은 주요 거점이기 때문에 당나라, 발해, 후의 거란이 치열하게 군사적 대립을 벌인 지역이다.거기다가 나라이름부터 발해이기도 하고.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학자별 발해 국경 표기 지도.png|width=100%]]}}}|| || 학자별 발해 강역 추정도. 상단의 초록색 원은 트로이츠코예 유적의 위치이다. || 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발해 북방 영토 범위에 큰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위치가 기존 발해 영역으로 간주되던 기준선에서 한참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 너머의 서아무르 평원의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있기 때문.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발해인들이 서아무르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으므로 아무르 강 너머까지 지배 범위가 확대될 수도 있다. 차지했던 남만주, 연해주 지역은 산지비율이 많다. 그렇기에 사람이 살기 어렵다. 북만주나 요동쪽이 평야 비율이 많다.[[https://mlbpark.donga.com/mp/b.php?p=151&b=bullpen&id=202008140046189832&select=&query=&subselect=&sub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4aRGg2Yih9RKfX2h3aXHl-A5mlq|#]]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