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목소리만 컸던 주전론 ===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조선은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나 싸우자는 목소리에 비해 정작 실질적인 대비책을 제시하는 정온, 윤황[* [[윤석열]]의 부계 직계 조상이다.], 최명길 등의 제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게 문제였다.[* 정온과 최명길은 서로 성향이 달랐다. 정온은 주전론, 최명길은 주화론. 덤으로 둘 다 광해군 시절 배척받은 인물들이다.] 정온은 인조에게 모든 정예병력을 압록강으로 차출하고, 인조가 개성까지 행차해 군을 독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청과 전쟁을 하더라도 전장을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국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정온,윤황 뿐만 아니라 사간원의 간관들도 압록강에서 적을 맞아싸워야 한다고 상소했지만 인조는 젊은 간관들이 군사를 모른다면서 역정을 냈다.]놀랍게도 성향이 달랐던 최명길도 전쟁을 꼭 해야 된다면 정온의 주장이 합당하다고 찬성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등 준전시 체제로 돌입하지만,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이던 박로가 '지금 우리에게는 후금을 막을 힘이 없어요.[* 조선의 방위 체제는 12년전 벌어진 이괄의 난때 이미 소멸했고, 게다가 조선보다 훨씬 더 병력이 많았던 명나라조차도 이미 10년전 산해관 이북에서 병력을 다 철수해서 만주 및 요동반도를 다 내주고 근근히 만리장성에 기대 수비하는 실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입시다.' 하는 요지로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이라고 [[최명길(조선)|최명길]]도 상소하자, '''결국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인조는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자들이 반박하자 충격을 받았는지,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조선)|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 등에게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고 꾸짖는 등 완전히 입장을 바꿨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누가 이 조서를 들고 가는가''' 하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무려 7개월 동안이나 토론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조서를 가지고 간다고 청나라가 쉽게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누구든 쉽사리 나설 수가 없었다. 다만 7개월 동안 아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고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묘화약 때를 언급하면서 계속 명나라와의 관계를 인정해주고 칭제를 넘어가 달라는 취지로 글을 청나라에 몇 번이나 보냈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을 벌인 홍타이지는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 코앞까지도 이런 지지부진한 인조와 신하들의 행태는 변함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청군과 격돌하는게 겁이 났던 인조는, 명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 및 최명길의 조언에 따라 청나라의 입장 확인 및 청군의 사정 정탐을 위해 역관 권인록(權仁祿)을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636년 9월) 이들은 심양을 정탐했으나 홍타이지와의 접견은 거부당한 채 돌아오고, 조선에서는 강경파들이 더욱 득세하게 되어 최명길을 파직하기에 이른다. 결국 11월에 이르러서야 화친 얘기를 꺼낸 박로가 사신으로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결정되어 출발했지만,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박로가 [[압록강]]을 채 넘기도 전에, 청군이 이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박로와 박난영은 중화에서 청군 선두가 박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방산성에 피신하였고, 이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청군에 생포되었다.[* 염헌집 박로신도비명][* 박로는 40일 동안 잡혀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풀려났다. 이듬해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따라갔다가 신병으로 3년 만에 귀국하였고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한편 박난영은 본래 [[사르후 전투]]때 종군했다가 포로로 잡혔고 이후 정묘년에 [[강홍립]]과 조선에 돌아와 후금과의 외교통으로 활약했다. 박로와 함께 청군에 잡혀 억류되었던 중 조선에서 보낸 가짜 왕제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한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