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조선군의 남한산성 구출시도 === 물론 조선군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곧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8도의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합된 지휘와 물자 보충이 이뤄지지 않아 각자 알아서 진격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게다가 인조 정권 이래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중앙군과 달리, 지방군은 훈련도가 제각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지방군은 대체로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고, 농한기에만 형식적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지방군이 훈련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의심을 받기 쉬웠다. 그 이유는 [[인조]] 자신이 지방군격인 황해도의 평산부사 [[이귀]]의 병력으로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중앙군격인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 이흥립이 포섭되어 내통이 있었다. 이흥립은 반정군의 도성진입을 방관했고, 결과적으로 반정세력은 지방군만으로 쉽게 광해군 정권을 전복했다.] 이 때문에 청군은 손쉽게 각개격파를 노릴 수 있었다. 강원도 지방군의 검단산 전투, 충청도 지방군의 험천 전투같은 패배도 있었으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에서는 [[전라도]] 지방군과 [[평안도]] 지방군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광교산 전투]]에서는 홍타이지의 매부 슈무루 양구리(舒穆禄 揚古利)를 비롯한 청군의 굵직한 장수 3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패배하여 퇴각해야했다. 제일 큰 문제점은 도원수 [[김자점]]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17,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군대였기에 편제가 제각각이었고 새로 도원수로 임명된 심기원의 존재로 인해서 지휘권에 대하여 잡음이 생겨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고 전쟁에서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참고로 조선 각지의 근왕군이 [[임진왜란]] 당시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조(조선)|선조]]가 안전을 보장받은 게 컸다.]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사실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만 했어도 청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칠 때 동원한 병력이 18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다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당시 조선 속오군은 8도 속오군을 다 합쳐 8만을 넘는 수준이었고 청군이 급하게 내려오느라 다수의 부대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후방도 전혀 안정되지 않고 군대의 대부분이 그대로 수도권에 대기타고 있는 청군의 상황에서 10만 가까운 조선군이 집결하기만 해도,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의 포위를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웠다. 홍타이지가 아직 건재한 명나라를 두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일개 변방에 불과한 조선까지 직접 내려온 이유도 인조를 빠르게 압박하여 신속히 끝을 내려는 이유에서였다. 속전속결로 한양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군대를 급속도로 전개했고, 보급선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공성전이 길어진다면 역으로 청군이 집결한 조선군에게 압박을 당할 가능성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