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결과와 영향 == ||[youtube(bS4_e9-p_6o)]|| 이로써 조선은 '''개국 이래 이어오던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이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구 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 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 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예전 중화 제국이 관례로 보답하는 하사품도 별 거 안 내줘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갔던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은 항복조건으로 청의 [[명나라]] 공격에 병력을 파견해야 했다. 청나라군이 조선군의 참전에 재정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명전에 참전한 조선군은 여러 전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이것도 사실 명을 도와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군량을 가져가야 했으므로[* 병량 보급이 제대로 안되자, 도원수 [[강홍립]]은 여진족 마을의 약탈을 지시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아주 가혹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가 직접 대군을 끌고 참가한 [[송산 전투]]에서 조선군 및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편으로 참전했고, 이때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 실제로 청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이기고 있을 때에도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은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명나라 항장들이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것을 청나라 측에 진술하여 조선 조정은 굉장히 난처해진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명나라도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하면서 조선을 삥뜯고 있었으며, 아예 명나라 가도의 동강진은 동맹국 조선에 해적행위까지 하고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모문룡의 행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청이 입관한 이후 전쟁 배상금조로 내야 했던 세폐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 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한 이후의 일이고, 어쨌든 청나라가 1644년 입관하기까지 약 8년간은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역관광|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종속되어 조공국이 된 사실]]'''에[* 다시 말하지만 청은 당시 조선(1,100만명 내외)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여진족]]이 50만 ~ 100만인 판국에 조선에서 끌려간 조선인 포로가 50만 ~ 60만에 [[정묘호란]]까지 합치면 70만 ~ 80만명에 육박한다. (단, 조선인 포로들이 50~60만에 달했다는 통설은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한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출처]] 무엇보다 저 50~60만 명 이라는 숫자부터가 후금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물론 그때 청에는 귀부한 한인도 [[여진족]]만큼 있었고, [[몽골인]](20만)에다 이들 전체 숫자와 맞먹는 하층민들까지 있어서 총 인구는 그래도 200만 ~ 400만까지 나오므로 포로와 여진족 인구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나치게 증가한 인구로 인한 식량 부족도 병자호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멘탈붕괴|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태조(금)|완안 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 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청나라]] 황실의 조상 [[동맹가첩목아|몽케티무르]]는 소시적 태조 [[이성계]]의 부하였고,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 다만 [[여진족]]은 [[유목민]]이라기 보다는 농사와 수렵, 수렵으로 확보한 모피 등을 내다 팔고 부족한 걸 사오는 교역을 더 중시하는 반농·반수렵 민족이였다. 주변 털러 다니지 않은건 아니였지만.]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역관광|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청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것은 최초의 전략적 목표가 명을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기에, 당연히 [[인조]]는 퇴위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량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 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 이에 최명길이 이러다가 힘 없는 백성들만 속환되지 못하게 된다며 청나라에 가격상한제를 제시했지만 실효는 없었던듯. 최명길 등은 한겨울에 심양까지 끌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들 빼고 도착한 조선인 포로들은 최대 50~60만 명 정도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나 당시 심양 전체 인구가 수십만으로 당연히 터무니 없이 과장된 수치다.(당연하지만, 정확히 조사하고 집계한 숫자가 아닌 조선 측에서 '대충 60만 명 정도 끌려갔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추정치이다. 과거에는 과장해서 기록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이와 비슷하게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일본 전국시대에 [[일본인]] 50만 명이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렸다는 것도 실제로는 대략 5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자호란은 일본에서처럼 해상을 통한 노예무역이 아닌, 육로를 통해 전쟁 포로들을 수백 km나 이동시켜야 했으므로 한번에 많은 인구를 끌고가기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당시 후금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 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中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44352|출처]]] 정확히 말해 그 당시 후금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60만 명 이라는 저 숫자부터가 후금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하였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출처]]) 여성 포로의 경우 인터넷에서 떠도는 자료가 있다. '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 시 무조건 [[순장]]하라"고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여성 포로에 관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과장된 게 많다는 게 중론이다. 청측 공식 기록에는 왕공 귀족 장원의 농노나 뽀이가 되었다고 되어있고 애당초 포로 확보 이유가 노동력이라 남성이 주 대상이고 여성은 포로로 끌려가기 전 자결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남성이 주류다.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 이유는 만주족 병력이 적은데다가, 조선의 조총수가 청나라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인조]]는 왕좌를 지킨 이후에 대대적인 처벌극을 벌여 [[김경징]], 장신을 비롯해서 [[강화도]]에서 달아났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고, 호종하지 않은 신하들과 근왕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장수들을 적을 눈앞에 두고 임금을 버리고 달아난 죄를 물어 엄벌했다. 이때 [[김자점]]도 도원수가 되어 뭉기적거리고 있었다고 처벌 당했으나, 이후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사사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때 인조에게 영합함으로 최고 권신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호종한 신하들에겐 상을 주었으나 [[김상헌(조선)|김상헌]], 김상용 등에게는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 >“[[강화도|강도(江都)]]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날이나 보내면서 노닐다가 적의 배가 강을 건너자 멀리서 바라보고 흩어져 무너진 채 각자 살려고 도망하느라 [[종묘]]와 [[사직공원(서울)|사직]] 그리고 [[강빈|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버렸을 뿐 아니라 섬에 가득한 생령(生靈)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약탈당하게 하였으니, 말을 하려면 기가 막힙니다.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경기 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 수사 강진흔(姜晋昕)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2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