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청나라의 승리 원인 === 이미 청나라는 10년전 [[정묘호란]]이라는 [[반면교사]]를 갖고 있었고, 청은 조선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정묘호란때 청군은 안주성을 공략하면서 농성중인 조선군을 전멸시켰지만, 이 때문에 며칠 허비한 끝에 조선이 대응태세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도피하여 장기전으로 흘러갈 여지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병력이 부족한 청군은 명나라의 역습이 두려워 조선과 어정쩡하게 강화를 맺고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정묘호란에 청나라군은 조선을 항복시킨다기보다도 자신들과의 국서조차 계속 거부하는 조선과 소통의 경로를 트고, 대명전쟁에서 조선을 중립에 못박아 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성(의주성, 정주성, 안주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조선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고, 결국 후금군이 평산까지 와서야 조선이 교섭에 응해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걸 교훈으로 삼아 병자호란 때는 조선 조정이 도피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아예 시간낭비를 할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수도로 육박해 들어가는 한편 강화도 공략에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어차피 청군 기병은 단기간의 보급품은 스스로 휴대했으므로 보급로를 확보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므로 의주의 백마산성이나 그밖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는 여러 산성들을 그냥 지나쳐 무인지경으로 닥돌해 들어갔다. 인조는 청군이 국경을 넘은지 10일이 지난 12월 13일에야 적이 한양에 육박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4일에 부랴부랴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청군이 선수쳤기 때문에 길이 막혀, 결국 남한산성으로 가서 농성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이렇게 청나라 기병의 신속한 진군 속도가 제일 큰 승리 요인이였다.''' 원래 만주족은 인구가 적고 가용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후금의 전성기에도 총병력은 6만명 정도였다.] 주둔병을 두지 않고, 단기간의 보급품을 스스로 휴대한 기병의 기동력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청나라 기병은 누르하치 시절부터 여진통일 전쟁 및 명나라와 몽골 여러 부족과 전쟁으로 50년간 거의 매년 전투를 했을 정도로 실전경험도 많았으며,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본거지 [[심양]]에서 약 2000km 떨어진 [[산서성]]까지 며칠만에 도달하여 여러번 치고 빠지곤 했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에는 다시 산서성보다 더 먼 내몽골 서쪽 끝의 [[오르도스]]까지 원정해서 북원의 칸인 링단 칸을 패퇴시키고 내몽골 여러 부족을 복속시킨 후 [[원나라]] [[전국옥새]]를 손에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 기병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명약관화했다. 그리하여 청나라 기병은 [[정묘호란]] 때와 달리 산성을 건들지 않고 왕을 잡기 위해 한성으로 쾌속 진격을 했으며, 결국 청나라는 인조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얼마나 빠른 진군 속도냐면 의주성에서 안주성까지 단 2일만에 180km 거리를 돌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일도 안되는 시간동안 안주에서 개성까지, 즉 235km를 왔다. 이것은 하루 평균 78km를 진군한 것이다. 이로부터 약 300여년 뒤 [[제2차 세계대전]] 때 [[전격전]]으로 유명한 [[에르빈 롬멜]]의 기갑사단이 하루에 70km를 못 넘은 걸 생각하면 청나라가 얼마나 신속하게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위에서 보았듯이 청나라 기병은 여러번 내몽골까지 수천km를 기동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심양에서 약 600km밖에 안되는 한양까지는 기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병이 원정중 보급을 스스로 휴대해야하는 허허벌판인 내몽골에 비해 조선은 인구도 많고 진격로의 선상에서 약탈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보급의 난이도도 훨씬 낮았다. 이들 청군의 치휘관은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왔던 [[타타라 잉굴다이]]와 [[하다나라 마푸타]]였고, 이괄 잔당이 청나라로 귀순하여 길잡이들은 여럿 있었다. 당연히 조선 지리, 진격로에 대해 익숙해진 청군이 길을 잃을 위험도 없었다. 여기에 [[이괄의 난]]때 약 1~2만의 조선의 북방군이 소멸한 것도 청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근데 이 주장은 인조를 옹호하는 측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야기인데 병자호란 당시 이괄의 난은 이미 12년전 이야기였고 정묘호란도 9년전 이야기였다. 1만의 병력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전에 똑같은 경로로 온 침략이 있었는데, 10년 동안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는 인조나 조정의 무능으로밖에 설명이 안된다.] 게다가 이미 인조는 정묘호란 때와 똑같이 강화도로 몽진하려는 우를 범했다. 청나라는 이미 조선 조정이 이렇게 움직일 것을 알고, 약점인 바다싸움에 대비하여 강화도 공략에도 만전을 기울였다. 모문룡 옛부하들이 가지고 온 수군 또는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 어부들의 도움으로 강화도를 공략해 쉽게 왕자들을 포로로 잡고 승리할 수 있었다.[* 일부 역덕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도피했으면 강력한 조선 수군의 방어를 받아 이길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강화도가 남한산성보다 먼저 함락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판옥선]]은 강화도 주변 해역의 전투에는 잘 맞지 않는다. 판옥선은 임진왜란때 조수간만이 적은 [[남해]]에서는 대활약을 했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서해]] 연안에서는 썰물 때 기동이 어렵다. 썰물이 들면 [[흘수선]]이 높은 판옥선은 인천앞바다나 [[강화해협]]에서 꼼짝없이 뻘에 갇혀 사정거리가 긴 청군의 [[홍이포]]에게 직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조선측의 입장에서는 왕자들을 강화도로 도피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남한산성에 준비를 철저히 갖춰 장기농성을 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론적으로 청나라군은 지연전을 펴러던 조선측의 전략을 훤히 알고 이를 분쇄하기 위해 장기인 기동력을 철저히 활용했다. 여기에 정묘호란 때의 경험으로 조선조정이 대피하게 될 강화도 공략이 승리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점을 제대로 알고 움직인 청나라는 기동력으로 조선의 지연전을 무력화시켰고, 이어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결국 조선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