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조선의 친명배금 노선 옹호(불가피)론 === >물론 1620년대 이후 1644년에 이르는 명ㆍ청 교체의 전야에, 조선사회의 지식인들이 임진왜란 때 형성된 '재조(再造)'의 기억을 떠올리며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데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의 논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집착의 이면에는 14세기 말 이래 200년 동안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서 군림하던 명의 위세가 소멸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정황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명에 대한 미련에는 명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 "지금 계획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의(禮義)를 지킬 상황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니, 신 역시 예의에 의거하여 따질 겨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利害)로서 논한다 하더라도, 힘센 이웃의 한나절 강포함만을 두려워하여 '''[[명나라|천자]]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산해관(山海關) 아래 줄지어 주둔한 군사들과 바다 위 군함에 올라탄 수졸들은 '''비록 오랑캐를 쓸어내고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할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잘못을 벌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의 창귀(倀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물으려는 군사가 천둥번개처럼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 만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 당도할 것이니, '''두려움의 대상이 오직 [[청나라|심양]]에만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 >1639년 시점에서 작성된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이 만약 청의 편에 완전히 붙었다가 명이 만에 하나라도 세력을 회복할 경우 그 보복을 감당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는 '친명 사대주의자'의 한낱 공허한 외침만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보더라도 적어도 강희제 즉위 이전까지, 하다못해 입관(入關) 이전까지 중원의 정세는 대단히 유동적이었으며 그 향배를 쉽게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명의 세력 회복을 바라며, 혹은 두려워하며 임진왜란의 기억을 부여잡고 있던 명ㆍ청 교체기 조선 지식인들의 사유를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몽상적 관념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그 기억 속에는 중화 문명의 담지자인 명에 대한 존숭과 더불어 '''명의 현실적 위세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 >우경섭,『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유니스토리, 2013). (pp.86~89) [[https://blog.naver.com/lord2345/221112905125|출처]] > 실제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의 인조 정권의 외교 정책은 분명 명나라와 청나라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 집권 초기부터 명나라는 조선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며 의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1629년에는 조선이 "왜노와 통혼하고 노적에게 정성스럽게 대한다(媾倭款奴)"는 말이 그들 조정에서 나올 정도로 조선을 의심하는 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조선의 행보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후금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후금은 불만을 서서히 키워가고 있었다. 국경 무역에 불만을 품은 후금 조정은, 1631년 만약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의 결말을 알 수 없었던 조선은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편에 방책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한, 조선은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이 끝까지 예측을 불허했던 점은 그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 > > 만약 이자성이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인 오삼계(吳三桂)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어쩌면 한인의 중원 지배가 그대로 유지됨과 동시에 만주인들의 중원 진공 또한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해 보면, 점차 청나라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했지만 '''청나라보다 최소 수십여 배에 달하는 인구와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던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신속하는 것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모험이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조선이 그 보복을 피하고자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먼저 인정한 뒤,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이 명나라 또는 그 뒤를 계승한 [[순나라|새로운 한인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준 '은혜를 배신'한 번국(藩國)에 대한 보복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들 조정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 병자호란을 능가하는 무서운 보복전이 뒤따랐을 것이다.''' >---- > 조일수(Ilsoo David Cho),「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역사비평』121, 2017). (pp.362~364) [[https://blog.naver.com/lord2345/221496246257|출처]] [[일제강점기]]때 부터 지금까지의 병자호란에 대한 대표적인 시각은 "맹목적인 대명 사대주의가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인조정권의 친명배금 및 척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이나 실제 인조반정 후 후금(청의 전신)에 대한 외교정책은 광해군대의 외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학설들이 학계내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주장들을 펴는 학자들로는 대표적으로 한림대의 오수창 교수나 인하대의 우경섭 교수 그리고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의 조일수 선임연구원 등이 있다. 그리고 역덕 커뮤니티들에서도 조선의 친명배금을 옹호하는 입장이 많다. 즉, 기본적으로 명을 편드는 조선의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명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으며, 사대의 예로 표현되는 행위들의 근본 동력 또한 명의 국력이 조선을 충분히 위협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동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조는 1636년 2월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라는 요청에 대해 '대청국황제(大淸國皇帝)'라 부르진 못하겠으나 '청국한(淸國汗)'이라 부를 수는 있다는 제안을 내놓는 등 청 측과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지금 시점에야 청의 승리가 명백해 보이지만,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명과 청 양국 간 승패의 향방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토목의 변|명은 몽골과의 대결에서 50만 대군이 몰살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도 살아남은 국가]]였으며, 청과 대결하던 때도 망하는 그 순간까지 실제 국력은 명이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영원성 전투 |청은 자주 명에게 패배했고]], 조선에다가 ‘명과 화해할 수 있게 다리를 놔달라’는 요청을 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명이 청을 물리친 뒤 조선을 배신자로 규정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인조로서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즉, 인조도 줄타기 하느라 진땀 흘려야 했다는 것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12070475962421|“병자호란 치욕은 인조의 사대주의 때문? 오해다”]] 또한 당시 청에 대한 강경론에는 명에 대한 사대의 예와는 별개로 청측의 횡포에 대한 '''조선측 스스로의 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청은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황금·백금 10,000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더불어 정병(精兵) 30,000명까지 요구해오는 등 조선측에 무리한 요구들을 계속해왔다. 심지어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하였고 장차 명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며 이와 함께 후금의 오랜 숙원 중에 하나인 수군 함선을 보내라는 요구도 하는 등 반복적인 무리한 요구들로 조선내의 반청감정을 계속 고조시켰다. >"요즈음 오랑캐 사신 용골대 등이 가지고 온 거만한 글에 존호(尊號)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정묘년의 난리에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기미(覊縻)의 거조가 궁여지책에서 나와 생민(生民)의 고혈을 다 기울여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비굴한 말로 애걸한 것이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위호(僞號)를 참람하게 칭하려고 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으로 여길 것으로''', 상의하여 정탈한다는 등의 말에서 그들의 행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거듭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그 글을 불태우고 사신을 참하여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의당 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참람하게 반역하는 단서를 통렬하게 끊어, 저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지키는 바에 대해 기강을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 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서달에 이르러서는, 천조에 대해 새로 반역한 죄가 있으니, 우리 나라와는 통신(通信)을 왕래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사신을 따라 제멋대로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빨리 구금하라 명하여 상경하지 못하도록 해서 엄히 끊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2021_003|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3번째기사 1636년 명 숭정(崇禎) 9년]] 이러한 후금의 지속적인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되었는데 위의 [[홍문관]]의 차자만 보아도 단순히 명에 대한 사대의 예 그 자체 보다는 청이 정묘호란 당시에 조선을 유린하고 조선을 추후에라도 속국으로 만들것이며 그렇게 능욕을 당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나라가 망하더라도 당당하게 싸우는게 훨씬 더 옳다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막연한 명의 보복 가능성보다는 눈앞으로 다가온 청의 침공이 훨씬 더 실재적인 위협이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주장들이 설득력이 낮다라는 주장[* 허태구(2019), "병자호란 연구의 새로운 定礎 서평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403쪽.", 《인문논총》 76, 3.]도 일부 있지만 이는 조선이 진정 우려한것은 위의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승리가 어느쪽으로 결론날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을 간과한 지적이다. 즉, 일시적으로 조선이 청에 굴복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명이 청을 이길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경섭,『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유니스토리, 2013). (pp.86~89); 조일수(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121;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6~67.][* 이해하기 쉽게 현대에 대입해보자면 미중 갈등에서 중국이 인구가 많고 가까우며 겉보기에 위협적이라는 이유로 한국이 미국을 배신하고 친중을 해야한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논리가 된다. 후대에는 어떨지 몰라도 당대인인 우리 입장에선 수백 년 강국인 미국이 신흥강국 중국에게 완패할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더 무리인데다 그런 도박적 가정으로 수십년 혈맹인 미국을 배신하면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대한민국은 1세계에서 제외되어 엄청난 실리적 손해를 보게될 것이다. 게다가 만약 미국이 중국을 완전히 제압하고 패권을 다시 공고히 하면 '''배신자''' 한국을 응징하려 들텐데 이 뒷감당은 어찌하겠는가?당시의 친명과 친청은 현대의 친미 친중과 거의 비슷한 구석이 많아 이렇게 대입해보면 조선이 처해있던 외교적 어려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위에서는 계속해서 척화신들의 논리에 현실주의적 논거보다는 명분주의가 우선한다고 지적하지만, 반대로 그 '현실적'이었다던 주화신의 대표주자 [[최명길(조선)|최명길]]조차도 기껏 병자호란을 화의로 이끌어놓고는 명과의 연락과 공조를 이어가려 노력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이 재조지은을 강조하는 명분론을 마냥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다시 누군가에게 침공을 받으면 어디에 도와달라고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 빠르게 청에게 붙는다고 한들, 그럼 청은 이 수백년의 상국, 그것도 조선 말마따나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주기까지 한 맹방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편을 바꾼 번국을 위에 어느정도로 명운을 걸고 챙겨줄 것인가?[* 물론 가장 좋은 건 명이든 청이든 '상국'에 도움 청할 것 없이 자체 군사력만으로 방위가 가능한 것이겠지만, 조선의 체급상, 또 이 '상국'들의 외교정책상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최소한 5호16국, 5대10국 수준의 화북 분열 헬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한 중국 전체는 고사하고 화북을 통일한 왕조만 되어도 조선에 대해 강력한 군비제한을 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고, 실제로 효종대에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들며 재군비 허가를 요청했지만 청의 대답은 '''NO'''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16세기 이후 일본의 관동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조선과 일본의 체급차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고 조선 혼자 아무리 용을 써봐야 고려가 그랬듯 과다군비로 무너지는 길을 피하기 힘들었다.] 혹은 설령 편을 바꿔탄다 한들 당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나당전쟁|어제의 동맹이 오늘 뒤통수를 치며]]''' 아예 한반도를 완전 병탄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는 어찌됐건 정말로 수십만 대군을 퍼부어가며 조선을 지켜주었고, 또 그런 투사능력이 있음에도 조선을 병탄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완벽하게 인증해 준, '''한국사에서 몇 안되는 믿을 수 있는 중화통일왕조 우방이었고'''[* 멀리 가면 연나라-고조선, 통일왕조만 봐도 한나라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중화권과 한민족계열의 충돌사를 보면, 한민족 국가와 중화 통일왕조가 국경을 맞대고도 사이좋게 지내던 시기는 병자호란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정말로 [[조명관계]]밖에 없었다. 나당전쟁 이후 우호관계를 회복한 신라-당은 중간에 발해나 여러 세력이 껴있었고(애초에 발해의 흥기 때문에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원리로 나당관계가 회복된 것이지만), 고려-북송 역시 중간에 거란이 있었다.] 이를 상실한다는 것은 조선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후의 역사를 익히 아는 현대인들 입장에서야 에도 막부는 조선에 우호적이었고 청 역시 조선을 완전 병합할 생각도 없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속 편하게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그거야 2세기동안 그럴 일 없었던 게 다행이지 국가 지도층이라면 당연히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이런 포지션 변화가 국내 정치에 가져올 파장이다. 사실 '명분'이나 '의리'라는 건 달리 말하자면 '질서'라고 바꿔 써도 무방하며, 중원의 왕조교체, 즉 질서의 재편은 당연히 국외에서만으로 끝나지 않고 국내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정치가 다원화된 현대에도 주요 강대국에 대한 포지션 설정이 국내 정치에서의 입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천조국 초1극의 국제정치 체제였던 당대에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조선이란 나라가 [[원명교체기|어떤 시기에]], [[신진사대부|누구에 의해]], [[위화도 회군|어떻게]] 출발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명나라 버리고 편을 갈아탄다, 그것도 중화왕조를 버리고 '''북방제국'''으로 갈아타자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다.[* 주화신의 대표격인 [[최명길(조선)|최명길]]조차도 언제나,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에도 '''재조지은은 잊을 수 없으며 대명전선 파병 같은 짓은 할 수 없음'''이라는 입장은 확고했다. 심지어 청은 그 치떨리는 몽골 대원전국옥새를 손에 넣어서 칭제를 했으니 당대의 시선에서는 '''사실상 혈통만 바뀐 몽골제국의 재림'''이나 다름없었다. 좀 더 앞의 사례를 살펴봐도 [[삼국통일]]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종식과 [[수당시대]] 통일제국의 출현에 발맞춰 이 통일제국 주도 질서에 영합한 [[신라]]가 자신들보다 몇체급 큰 백제, 고구려를 연이어 멸망시킴으로써 가능했고, [[후삼국시대]]는 [[당나라]]의 붕괴와 [[5대10국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벌어졌다.] 이제 다시 명청교체의 흐름을 조선이 나서서 인정한다면, [[성리학]]적인 [[상하관계]]에 따라서 '''번국이 천조를 고를 수 있는데 신하는 군주를 고르지 못하란 법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고,[* 대청칭신의 영향을 확인할수는 없지만, 어쨌든 조선왕조는 이후 정말로 택군, 즉 신하들끼리 짝짜꿍해서 [[경종(조선)|멀쩡한 후계자]] 놔두고 [[영조|누구]]를 왕으로 밀어줄지를 선택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자면 [[임진왜란|40여년 전 일]]을 두고 '''"[[정명가도|그래서 그 때 그냥 일본애들 말대로 명나라 치게 길 내어주고 편 바꿨어야 했다는 얘기냐?]]"'''라는 소리까지 나온다면 뭐 답이 없다. 즉 '나라가 망해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는 달리 말하자면 '백날 잔머리 굴려봤자 어차피 명 주도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순간 이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고, 현대인들 보기에는 그깟 왕조교체가 뭐 대수라고 싶겠지만 그런 대변혁은 당연히 수백 수천의 피를 흩뿌리게 된다.[* 한국사에서 그나마 피 덜 보고 왕조가 교체된 여말선초만 해도 [[위화도 회군]] 하나만 보아도 개경 시가전, 우왕-최영 라인의 숙청 등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만 적어도 천 단위다. [[후삼국시대]]처럼 [[군웅할거]]와 내전의 수순을 밟으면 기본 십만 단위이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나라의 형태는 남아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고민이다.] 그렇게 조선이 청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도 멸망을 면한 것은 청의 여러 한계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동아시아 정치철학 끝판왕을 대체할 새로운 이론과 이에 기반한 신진 지배층이 형성되지 않았던 덕이고,[* 그렇기에 조선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열을 올렸고, 이를 대체할만한 잠재력을 지닌 서학을 탄압할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냥 조선에게 악운이 따라줬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요약하면, 이러한 척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던 동시에 그와 별개로 명나라와 청나라 간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던 당시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ㆍ역사적 맥락을 좀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에는 명청대전기의 결과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확실하게 예측 할 수 없었으므로 그 당시 기준으로는 명나라를 편드는것 또한 합리적인 외교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기실 북방민족 VS 중원왕조간의 싸움에서 대체적으로 전자가 승리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긴 것도 아니고 이기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겼다고 해도 완벽히 이긴 것도 아니고 즉,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명나라와 청나라 중에서 누가 이길지 판단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명나라의 멸망에는 전례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청나라는 너무 운이 좋았다.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허망하게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지면서 망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오삼계]]가 휘하 병력들을 모두 이끌고 [[산해관]]의 문을 열어주어 청나라측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청나라가 스스로 산해관을 넘어서 중원으로 입성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명나라가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다고 해도 [[오삼계]]가 청나라가 아닌 같은 한족인 [[이자성]]의 [[순나라]]에 항복을 했다면 청나라가 산해관을 자력으로 넘기도 전에 [[이자성]]의 [[순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제패하였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거기다가 [[남명]]은 여러 황제들이 난립했는데 이 역시도 그 이전 동진이나 남송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한 오수창 한림대 교수는 최근 출간된 반연간 학술교양지인 ‘한국사시민강좌’(일조각) 제36집에 기고한 ‘청(淸)과의 외교실상과 병자호란’이란 글에서 “인조반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군사정권의 극복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과제였던 1960년대에서 1990년대 초 지식인들의 현실비판 의식과 연결돼 나온 것”이라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인조반정이나 그 이후의 서인정권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전쟁의 본질은 청이 기존맹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조선을 향해 자기 나라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던 끝에, 일관되게 형제관계를 유지하려 한 조선을 침략한 데 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설명이다. > >(중략...) > >또 [[이덕일]]씨는 병자호란을 ‘쿠데타 정권의 허황한 외교정책 때문에 빚어진 고통’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최근 연구에서 실제 인조반정 후 후금(청의 전신)에 대한 외교정책은 광해군대의 외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이 이미 조목조목 밝혀져 있으며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 당시 화친정책의 유지를 강력히 주창했던 최명길과 장유, 이귀, 김류, 홍서봉 등이 모두 반정의 핵심인물이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지적이다. >----- > -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050224010124300740020|“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오수창 한림대 교수) 다른 한편으로는 '''[[인조반정]]과 인조대의 [[인조/평가|외교정책]]을 현실비판 의식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태도가 본질을 왜곡한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병자호란의 본질이란 청이 기존맹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조선을 향해 자기 나라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던 끝에, 일관되게 형제관계를 유지하려 한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 진짜 전쟁의 본질이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인조반정이나 그 이후의 서인정권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덕일]] 등은 병자호란에 대해 ‘쿠데타 정권의 허황한 외교정책 때문에 빚어진 고통’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오수창 교수의 주장이다. 이러한 점에서 병자호란을 해석하고 연구할때에는 현대의 시각이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서 살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https://youtu.be/_m96P1Mo0uc?t=879|임용한 박사가 말하는 양안 관계와 병자호란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9JG0acYjTpk|[궁극의 인터뷰] 중립이란 힘이 있는자의 특권이다! feat.임용한박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