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자호란 (문단 편집) === 양국 관계의 파탄(존호 문제) === 1636년 2월 [[잉굴다이]], [[마푸타]](Mafuta)를 필두로 한 후금의 사절단이 인조의 왕후인 인열왕후의 장례식 참석차 조선을 방문한다. 그러나, 앞서 복속한 몽골 왕공 인사 77명이 사절단에 포함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실제 목적은 그간 후금의 세력 확장 성과를 조선에 과시하고 곧 있을 [[홍타이지]]의 [[칭제건원]]에 대한 조선의 반응을 떠 보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 부터였는데 용골대 일행은 2월 23일에 한양에 들어왔지만 이미 의주부윤의 치계가 2월 16일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당시 사절단은 인조에게 홍타이지의 공덕을 칭송하고, 후금의 세력은 확장일로에 있으며, 아우인 조선국왕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라는, '''즉, 군신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명 황제만을 황제로 인정하는 조선을 충격에 빠뜨리게 되며, 후금에 대한 매우 적대적인 여론이 조선 내에 형성되게 된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대 격론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에 대한 당시 조정 회의의 의견은 개돼지 같은 오랑캐가 감히 참칭하며 조선을 신하로 두고자 한다며 당장 용골대 등을 포박하자는 비분에 찬 의견이 대다수였다. 당시 비변사의 대신들은 홍 타이지의 친서가 참칭하고 조선을 '너희 나라'라고 깔보며 협박하고 패만스럽다는 이유로 용골대가 머무는 곳에 몰래 두고 왔고 용골대에게 서신을 보내 후금이 조선을 형제의 예로 보지 않고 노예와 같이 보고 있으니 차마 볼 수가 없고 다시 홍 타이지에게 되돌려 주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후금의 요구(‘군신(君臣)의 의(義)’ 강요)에 조선의 분노는 완전히 폭발하게 되었고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http://egloos.zum.com/gil092003/v/9982426|출처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3%91%EC%9E%90%ED%98%B8%EB%9E%80&ridx=0&tot=417|출처2]] 결국 예상 이상의 조선의 강경한 반응에, 사정을 전혀 모르던 칭기스 왕공들이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이니 후금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이 반발하며 후금 사신들의 목을 베라고 촉구했고, 사절의 동선 근처에 조선 군인들이 무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등 사신들이 생명의 위협마저 느낄만한 상황이 추가로 연출된다. 게다가 사신이 떠날 때 백성들이 [[돌팔매]]로 응수하고 인조가 하달한 다음과 같은 선전교서가 평양 부근에서 입수된 것이 사태를 크게 키웠다. >요즈음 이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갑자기 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 결단을 내려 그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 >《인조실록》 32권, 숭정 9년 3월 1일 2번째 기사 공교롭게도 이렇게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인 후금으로 가져가게 된 것이 또 다시 후금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는데 '''홍 타이지는 조선이 형제의 맹세를 깨트렸다고 대노하였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이 정묘맹약을 저버렸다는 이유를 조선침략의 주요 명분으로 선전하였다.[*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丁卯胡亂期 朝鮮과 後金의 講和過程을 중심으로, 남호현(서강대), 조선시대사학보 제78집, 2016.09, 51 - 85 (35 pages)] [[http://egloos.zum.com/gil092003/v/9982426|병자호란의 가장 큰 이유<형제지맹 맹약 파기>]] '''1636년 4월 11일, 결국 홍타이지는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와 숭덕(崇德, wesihun erdemungge)이라는 새로운 존호 및 연호와 함께 국호를 대청(大淸, Daicing)으로 고친다.''' 즉위식에 조선에서 온 회답사와 춘신사도 있었는데, 이들은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음 날의 행사에서도 성찬을 엎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그러자 격분한 청 신료들은 그들을 처형하라고 주장했으나 홍타이지의 만류로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대신 홍타이지가 조선에게 보내는 국서를 받아서 귀국해야 했다. 이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대청황제를 자칭하고 조선을 또 다시 너희 나라[爾國]라고 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간 조선과 청의 갈등([[사르후 전투]] 참전, 공유덕, 경중명의 귀순 방해 등)을 꾸짖음과 동시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 앞으로의 개선 의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화호의 도리를 깨트리고 전쟁의 단서를 일으킨"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서는 통원보에 버려졌으나, 그 내용을 사신들이 옮겨왔기에 국서의 내용을 확인한 조선에서는 오히려 크게 반발하였고 이를 즉시 찢어버리지 않고 받아온 사신들을 처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는 등 더욱 대청강경론이 힘을 얻게 된다. 이에 2달 뒤인 6월에는 급기야 양국간의 관계 파탄의 책임을 청의 탓으로 돌리는 격문을 청나라로 발송하고자 하기도 했다. 이 국서는 단순히 책임만 묻는게 아니라 도요토미 일가의 사례를 들어가며 청나라를 사실상 질타하는 문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