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포왜란 (문단 편집) == 배경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조선 건국 당시 [[왜구]]들의 난동은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까지 골치를 썩이게 하는 요소였다. 사실 왜구들은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 집단이었기 때문에 조선과 중국을 넘어서 일본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일본 전국시대에도 왜구가 상당히 많아서 일부 [[다이묘]]들은 왜구를 매수해서 전력에 보강하기도 했다. 조선 초까지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조선)|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공격할 것을 명했고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으로 대마도와 왜구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한편 부산포와 염포(현 [[울산]] 광역시 북구 염포동 지역), 제포(또는 내이포,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등 3포를 개항하고 [[왜관#s-2|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는 유화책도 병행했다. 그 결과 왜구들의 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왜구의 준동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인식은 ''''범죄자 집단''''이었고, 실제로도 당시 조선을 찾는 일본인들 중에는 행실이 불량하거나 밀수를 위해 들어오는 범죄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즉, 조선 영내에 일본인들의 거주 구역이 들어서면 갈등이 심화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초기에는 조선 조정이 일본인들의 숫자를 약 60명 정도로 제한했으나 점차 무역이 성행하고 상호간의 교류가 늘자 자연히 왜관의 일본인 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세종대왕|세종]] 말년에는 '''불법 거주자가 2,0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이들에게 조선의 일반 백성조차 못 누리는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그동안 고초도를 벗어난 어업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하지 말라는 해적질까지 하며 '''조정의 공마선 약탈''', 살인 등등 각종 범죄를 일삼았다. 이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오지 마라는데도 눌러앉은 왜인들에게 유화책을 베풀었는데도 범죄나 일으키니 배은망덕하게 여겼다. 그러다보니 [[중종반정]] 이후 조선 조정은 왜관에게 강경책을 쓰기 시작하며 혜택들을 하나씩 줄여 나갔다. 그동안 불법으로 눌러 앉으면서까지 누렸던 혜택에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왜관의 일본인들은 부당하다고 느끼며 반발했는데, 여기에 더불어 이런 국가적 분위기가 '''불법이민자이자 범죄자 집단'''인 일본인들을 압박하고 엄하게 다루는 방침으로 흘러간다. 당시 부산포 첨사였던 이우증은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을 붙잡아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그 노끈을 활로 쏘아 떨어뜨리며 공포에 떠는 일본인을 보고 즐거워하는 식의 놀이를 즐겼다. 이를 주위의 조선 군인들도 칭찬하고 좋아하며 따라하여 전 군영에 번졌다. 당연히 이 행위는 일본인들의 증오를 사게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그간 저지른 죄의 반성이나 배상은커녕 겁을 준 게 괘씸하다고 여긴다. 이 와중에 쓰시마 도주의 내란 선동 지원 하에 결국 일본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