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신문 (문단 편집) === 서울신문 시대 === 서울신문은 감격적인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며 그 해 11월 22일 역사적인 새출발을 한다.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진 구한말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위대한 민족정신과 구국필봉을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과 사명으로 다시 잇게 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덕망높은 원로지도자 위창 오세창(吳世昌) 사장을 비롯한 주역들이 서울신문을 출범시키면서 '창간' 대신 '혁신속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45년 11월 22일 혁신 속간호의 지령은 제1호가 아닌 제13738호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의 전설적인 항일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에,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강제수용해 발행한 매일신보 지령을 더한 숫자다. {{{+1 '''●항일 민족정신 이어받아 '서울신문'을 열다'''}}} 현재 서울신문의 지령은 역사적 재평가 과정을 거쳐 일제에 점령된 매일신보 시절을 제외하고 대한매일신보의 지령만을 승계하고 있다. 하지만 광복 당시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가 가진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물론 매일신보가 가진 아픈 교훈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지령을 이어받았다. 물론 광복 당시 매일신보의 사원 600명을 비롯해 사옥과 윤전기 등 신문 제작 설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은 지령을 이어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당시 서울신문이 지령은 비판적으로 승계했지만, 지면은 명실상부하게 매일신보와 절연했다는 사실은 혁신속간호 곳곳에서 발견된다. 오세창 사장은 취임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괴뢰였던 매일신보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불식되고 해방 직전의 유일한 국문지로서의 완비한 설비를 미 군정청의 후의로 동지제현이 맡아 관리해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인 서울신문으로 새출발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파일:attachment/gwangbok3.jpg|width=400]] '''■8·15 광복''' 서울신문은 혁신속간호 사설에서부터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한 언론보도'에 충실할 것임을 천명했다. 나아가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과 민주주의적 질서수립'이라는 당면 과제에 매진할 것을 약속했다. 이같은 좌표는 해방공간 내내 진보적인 논조를 지향한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일방적인 좌파의 선전으로는 흐르지 않아 당시 서울신문이 한국신문사(史)에서 '중립지'로 분류되는 기초가 됐다. 역사적인 혁신속간의 위업을 담당했고, 이후 서울신문을 당대 최대 발행 부수의 권위지로 공인받게 하는 데 기여한 오세창 사장 이하 간부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주의자였다. 위창 선생 자신이 한국 근대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의 기자로 출발해 만세보, 대한민보 등 항일민족지를 창간한 이 나라 언론계의 선구자였다. 일제치하 조선, 중앙일보에 재직하던 시절 16회에 걸쳐 연재한 '백두산 탐험'으로 민족정기를 일깨운 주필 이관구와 국어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한 편집국장 홍기문(洪起文) 이하 편집간부 역시 내로라하는 최고의 언론인들이었다. 여기에 역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며 신간회 부회장등으로 독립운동을 해온 애당 권동진(權東鎭) 선생과 벽초 홍명희(洪命熹) 선생을 고문으로 추대함으로써 서울신문의 진용은 권위있는 민족의 대변기관으로서 한치도 모자람이 없었다. {{{+1 ●'''작가 등용문 '신춘문예 시대' 본격 개막'''}}}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한 결과 '서울신문' 으로 확정해 1945년 10월 25일 주총에서 의결했다. '워싱턴 포스트' 등에서 보듯 수도 명칭은 국가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신문 제호의 글씨는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서도(書道)를 전수받은 김무삼이 썼다. 서울신문사는 1949년 10월 작가로 향하는 화려한 등용문인 신춘문예의 공고를 처음으로 냈다. 다른 신문사에서도 신춘문예 현상공모를 실시했으나, 장르를 시, 동요, 동화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이때 서울신문은 과감하게 단편소설을 추가하면서 4개 부문에서 모두 17명의 심사위원을 초빙했다. 이렇게 첫 발을 내디딘 신춘문예는 6∙25 이후 5년동안 중단됐다가 소설가 이제하를 배출한 1956년 부활해 한국문학을 살찌운 문단의 산실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서울신문은 최근까지 소설가 한강·편혜영·임철우·하성란, 시인 나태주·이근배·박세미, 문학평론가 하응백·유성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파일:hankang the greatest writer.jpg|width=400]] '''■소설가 한강''' 서울신문 기자들은 6·25 전쟁 직후 모두 12차례 호외를 내며 최후까지 사옥을 지켰다. 서울신문은 이미 26일 6차례에 이어 27일 오후 4시까지 다시 5차례의 호외를 내며 11차례 호외를 찍어냈다. 이즈음 사내에선 “다른 신문사는 이미 해산해버렸는데 우리도 무슨 채비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1 '''●전쟁에도 "최후까지 신문 제작"…8명 희생'''}}} 최후까지 사옥을 지키던 박종화 사장 이하 간부들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가 대전으로 내려간 이상 우리도 소사(素砂·현재의 경기 부천시와 서울시 구로구 접경지역) 정도까지 옮겼다가 사태 호전을 기다려볼 수는 있다. 그러나 문을 닫는 것은 좀 더 두고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사장과 주필,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 공무국 요원 20여명은 회사에 남았다. 이때 조선과 경향 등 여타 중앙지는 이미 해산하고 문을 닫은 형편이었고, 동아는 27일 오후 4시 “전황이 절망적이고 더 이상 취재활동을 할 수 없다”며 호외 300장을 찍어 차에서 뿌리며 피란을 떠나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중앙언론사 중 유일하게 간부진과 사원이 끝까지 회사를 지켰다. 한강다리가 폭파된 이후 간부진과 사원들은 피란갈 방법이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태평로 사옥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북한이 '조선인민보'라는 선전지를 찍어내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파일:attachment/broken_hanganggyo.jpg|width=500]] '''■폭파된 한강교''' 가슴 아픈 사실은 6∙25전쟁 당시 서울신문에서만 8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박종화 사장과 끝까지 사옥을 지키다 지프로 피신하던 비서 이승로는 신문인 최초의 희생자였다. 한강다리 폭파를 확인하고 남산 밑에 있던 주필 오종식의 집으로 피신하던 비서 이승로는 중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북한군의 총탄을 맞았다 같은 차에 탔던 상임감사 강병순은 은신 중 붙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이밖에도 이사 김경진, 출판국장 김진섭, 편집부국장 박종수, 사회부장 이종석 등이 납북됐다. 또한 사회부 기자 한규호가 종군 취재 중 순직해 애석함을 더했다.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외국인 종군기자는 모두 17명, 국내 종군기자로는 한규호가 유일하다. {{{+1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 세종로에 세우다'''}}} 전쟁 후 서울신문이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 세종로의 명소가 된 선열들의 동상 건립 사업이다.당시 서울시청앞 세종로 큰길 한가운데 녹지대에는 37기의 석고 위인상이 세워져 있었다. 미술대학생들의 작품으로 좌대를 포함해 평균 2m 정도 높이의 초라한 모습에다 그나마 석고상이어서 훼손되기 쉬웠다. 마침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이들 석고상이 철거되자 서울신문사가 나서서 새로운 모습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국내에는 제대로 주조된 동상이 없었던 상태라 위원회는 해외공관을 통해 외국 동상의 사진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1966년 11월 2일 건립대상 인물을 선정하기 위해 학계∙문화계∙관계∙교육계∙실업계 인사에게 127통의 설문을 발송했다. 이 가운데 가장 천거를 많이 받은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사명대사 조상(彫像)을 1차 년도인 1968년에 건립키로 했다. [[파일:attachment/이순신_장군상(광화문).jpg|height=500]]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상''' 2년 동안의 산고 끝에 1968년 4월 27일 마침내 첫 동상이 건립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울 중심가에 우뚝 선 것이다. 서울신문은 그날의 기쁨을 사회면 톱에 '겨레의 갈 길 밝혀 성웅 현신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대통령 및 3부요인, 200여명의 각계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높이 17m, 동양 최대의 동상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어 14기의 동상이 연차적으로 세워졌으며, 각 조상마다 제각기 다른 특징이 강조됐다. 1972년 5월까지 5년에 걸쳐 모두 15기를 건립한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는 제막식을 가진 뒤 그 동상 관리권을 서울특별시 또는 유관단체로 이관했다. 장편소설 '객주(客主)'는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1465회에 걸쳐 연재됐다. 서울신문으로서는 최장기 연재 기록이다. 문학적 성과도 대단해 신문소설사(史)에서뿐 아니라 한국문단에 있어서 역사소설의 새 장르를 개척한 발군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간 체제였던 서울신문은 1980년 12월 2일자부터 조간 체제로 전면 개편됐다. 또 컬러텔레비전 방영이 시작된 1981년 다각적인 검토 끝에 국내 최초의 주간 TV 연예잡지 'TV가이드'를 탄생시켰다. 안방에 앉아 나이와 무관하게 모든 가족이 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원칙을 세워 1980년대 중반 부수가 가장 많은 잡지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신문은 수명이 다한 보신각종 대신 새 종을 만드는 중주(重鑄)사업도 진행했다. 원래 걸려 있던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인 1468년 현재 탑골공원인 원각사에 걸기 위해 만들었다가 절이 없어진 후 1619년 보신각으로 달게됐다. 보물 2호로 지정된 보신각종은 몸통에 금이 가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1985년 서울신문은 국민모금운동을 통해 7억 9600만원을 모아 보신각종 중주위원회(위원장 윤보선 전 대통령)에 전달했다. 1985년 8월 15일 새로 주조한 보신각종 첫 타종식이 열렸다. {{{+1 '''●한국 신문사 큰 족적…CTS 첫 도입'''}}} 1984년엔 미개척지로 남은 문화예술비평의 활성화를 위해 계간지 '예술과 비평'을 창간했다. 1985년 1월 1일 한국 신문사에 영원히 기록될 CTS(컴퓨터를 이용한 신문 제작 시스템)를 국내에 첫 도입했다. 같은 해 4월 6일엔 25개 국내 유관 언론단체와 5개 주한외국언론기관이 입주한 서울신문사·프레스센터 준공식이 열렸다. 당시까지 전통적인 활판신문 제작공정의 주체는 '납'이었다. 출고된 원고는 '문선부'에서 하나하나 활자로 바뀐 뒤 좀짜기나 모아짜기에 의해 지면으로 꾸며졌다. 그후 다시 지형을 만들고 연판을 부어 인쇄를 했다. 납을 녹여 쓰는데는 열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공정을 핫타입 시스템(Hot Type System)이라 불렀다. 이것과는 달리 납을 쓰지 않고 열처리도 필요없이 원고를 인자화하는 것을 콜드타입 시스템(Cold Type System)이라 표현했다. 이를 컴퓨터의 힘으로 해내는 것이 CTS였다. CTS 제작은 TV가이드부터 시작했다. 서체∙행간 등 기본체제를 정하고 몇 차례 실습제작을 해본 다음 1984년 7월 14일 제100호부터 전면 CTS 제작을 단행했다. 10대가 중심인 독자들은 예상 이상의 좋은 반응을 나타냈다. 그해 11월 서울신문 시험판 제작이 시도됐다. 기본문자 크기와 1단의 배수∙행수 등 문자에 관계되는 지면 구성요소 전반에 걸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가장 바람직한 기본체제가 확정됐다. 11월 22일 혁신속간 39주년 기념 특집호 가운데 8페이지가 CTS로 제작됐다. 그날 아침 반응은 대단했다. “정말 CTS로 만들었느냐”는 것이 관심있는 독자와 신문인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1 '''●100년 신문사 첫 시도…'가로쓰기' 적용'''}}} 10개월에 가까운 준비 끝에 1985년 6월 22일자로 '스포츠서울'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창간호는 고정 12면, 특집 12면을 합해 모두 24면이었다. 그중 14개면은 컬러, 10개면은 단색이었다. 창간호는 지금까지 우리신문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혁신적 체제와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컬러로 인쇄된 1면의 머리기사는 박종환 축구감독이 프로팀으로 간다는 특종기사였다. 이같은 편집은 창간사나 기획기사가 1면 머리를 장식할 것이라는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편집이었다. 3호부터는 '프로야구 스코어'를 안내하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한국 신문사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한글 전용 신문으로 젊은층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 모든 것이 전면 전산제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포츠서울 창간호는 70만부라는 엄청난 양을 인쇄했으나, 직접 구매하러 본사로 찾아오는 독자까지 쇄도해 30분 만에 동나는 진기록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