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호 (문단 편집) === 오나라 멸망 후 === 결국 280년에 [[사마염]]의 [[서진|진]](晉)에게 [[오멸망전|대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멸망한다.]] 손호는 [[왕준(무군대장군)|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각 사자를 파견해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는 '한나라가 천하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하고 구주가 분열되었을 때, 내 조상들은 강남을 차지했는데 지금 대진은 천자가 일어나 은덕을 사해에 펼쳤으며 어둡고 우매하여 구차하게 편안하려고 하여 천명을 아직 깨닫지 못했으나 오늘에야 이르러서야 천자의 육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감히 천조의 넓은 도량과 빛나는 은덕에 기대 머리를 숙여 귀순하겠다'고 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표전>에 따르면 외삼촌 [[하식]]에게 '하늘이 오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망하게 했고 무슨 얼굴로 선대 4명의 황제를 뵈어야 하느냐!'고 편지를 보냈고, 신하들에게는 '자리에 있는 여러 해 동안 정교가 흉패하여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속에 궁핍하도록 만들었으며 스스로 궁실에 거하면서 무거운 질병을 끌어안고 계책이 부족하며 생각하는 바가 중도를 벗어나 많은 것이 황당하고 참람했고 주변의 소인들로 인해 참혹함이 생기고 포학한 독이 횡류하니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해를 입었으며 어두워서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막힌 바를 찾아보니 내가 그대들을 저버린 탓이라고 했고 초나라를 버리고 한나라를 섬긴 [[장량(전한)|장량]]과 [[진평]]처럼 서진의 조정에서 출사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최소한 자기가 나라를 망쳤다는 자각은 있었던 듯 하다. 280년 3월 15일, 왕준이 가장 먼저 도착해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그의 결박을 풀어주며 관을 불태웠다. 사마주는 손호가 자신에게 인수를 주었기 때문에 사자를 파견해 손호를 돌려보냈다. 서진군에게 붙잡힌 손호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옮겨 5월 1일에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사마염은 그에게 귀명후(歸命侯)의 칭호를 내렸다. 또 손호의 태자 손근을 중랑으로 임명하고, 아들 중에서 왕으로 봉해진 자는 낭중으로 임명했다. 의복과 수레, 밭 30경을 주고 해마다 곡물 5,000석, 돈 50만 전, 비단 500필, 솜 500근을 주도록 했다. 《[[진서]]》 <[[사마염|무제기]]>에 따르면 오의 옛 명망 있는 사람들은 재능에 따라 순서대로 발탁하고 옛 오나라 황실인 손씨와 대장 중 사망한 가솔은 수양([[수춘]])으로 이주시켰다. 그래도 진나라에 끌려가서 바보짓만 한 유선과는 다르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예를 들면 낙양에 끌려가 [[사마염]] 앞에 무릎을 꿇은 손호에게 사마염이 '짐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고 하자 손호는 ''''신도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고 받아넘겼다. 똑같은 항복 군주라 할지라도 [[유선(삼국지)|유선]]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마염의 말을 잘듣고 고분고분하게 완전히 순종했는데에 비해[* 하다못해 사마소는 나라가 망한게 꼭 지탓은 아니라고 해도 죄책감은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깠고, 극정도 유선에게 "나라가 망했으면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라고 했을 정도로 순종했다.] 손호는 이런 식으로 사마염에게 계속 딴죽을 걸며 그를 부정하려 들었다. 하지만 사마염은 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손호를 일종의 [[코미디언]] 정도로 보았다.[* 놀라울 것도 없는게 손호는 능력도 인성도 최악이라서 사실상 오나라를 말아먹은 군주이며, 손호 위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기반도 명망도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상 아무런 위협이 안되는 인물이니 좀 건방진 말 몇마디 하는 정도로 과민반응할 필요도 없었던 것. 예를 들어 유선의 경우 촉한 멸망 이후 종회와 강유가 중심이 된 반란이 있었고, 촉한 자체가 국력은 약해도 명분이 상당히 강한 국가였던만큼 유선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유선에 대한 감시도 심했고, 유선은 철저하게 '난 다른 뜻이 없으니 살려주시오'란 어필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손호는 저런 식으로 막나가도 사마염 입장에서 웃어넘길 정도로 아무 위협이 안됐던 것이다.] 또 [[가충]]에게 왜 사람 얼굴을 벗겼냐는 조롱을 받자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을 해치려드는 무리는 그같이 벌해야 마땅하다"고 쏘아줬다고 한다.[* 출처: 《자치통감》.] 이는 [[위(삼국시대)|위나라]] 황제 [[조모(삼국지)|조모]]가 [[사마소]]를 토벌하기 위해 궐기했을 때 가충이 이끄는 병사에게 조모가 살해당했던 사건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으로 우회적으로 가충을 공격한 것이다. 일설에는 이것을 질문한 자가 가충이 아니고 [[왕제]]라고 하며 사마염과 왕제가 바둑을 둘 때 질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왕제가 손호에게 "듣기로 당신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사람의 발꿈치를 자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손호가 대답하길 "신하가 군왕에게 무례하면 그것은 낯짝이 없는 짓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것이 가장 적합한 벌이다." 그리고 당시 왕제의 두 발이 곧게 펴져서 사마염에게 닿을락말락 하니 그것도 추가로 조롱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세설신어]]》에서 나온 일화로, 또 한번은, 사마염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푸는데, 가무로 흥을 돋구고 있었다. 이때 손호에게 "듣기로 너희 오나라의 음악이 괜찮고, <이여가>(爾汝歌)[* 汝자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데, 귀명후(손호), 그대가 한 수 불러주면 어떤가?" 그때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손호는 항복했음에도 일국의 군주였으니 배우처럼 노래하게 시키는 것은 모욕적인 일. 하지만 손호는 정말로 노래를 부른다. >옛날에는 '''[[사마염|너]]'''와 이웃이었는데, 지금은 '''[[사마염|너]]'''의 신하다. '''[[사마염|너]]'''에게 술 한잔을 올리니, '''[[사마염|너]]'''는 만수무강하라. >(昔與'''汝'''爲隣, 今與'''汝'''爲臣, 上'''汝'''一杯酒, 令'''汝'''壽萬春) 당연히 일국의 황제에게 하기에 너무나도 무례한 내용이다. 하지만 손호의 이 대응을 좀 더 해석하자면 '''[[사마염|너]]'''는 스스로 짐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사마염|너]]'''를 [[이승기|'''너(汝)'''라고 부르겠다.]] 이건 '''[[사마염|네]]'''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여가>가 너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다.] '''[[사마염|너]]'''의 잘못이다.[* 당연히 만수무강하라는 말(令汝壽萬春)도 정말 잘 살으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고 ''''잘먹고 잘살거라 원수놈아''''라는 의미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는 뛰어난 대응으로,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모로 대비되는 촉한과 동오의 최후 군주스러운 일화들이다. 다만 손호의 이런 모습을 근거로 그의 패기나 비굴하지 않은 면모를 너무 고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당대의 명분론적으로 보건 현대인도 이해하기 쉬운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건 일국의 황제였던 자가 적국에 투항하여 무릎꿇고 칭신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은 것으로 이미 더할나위없이 완벽하고 철저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고, 이렇게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인 이후에 말재주를 좀 부려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해 봤자 참기름 한 드럼통 쏟고 깨알 두어개 주운 셈이다. 차라리 나라가 망했어도 어떻게든 재기할 기회라도 노렸다면 그거야말로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겠지만... 그랬으면 당연히 사마염이 손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손호가 보여준 패기있는 모습이란 것도 진짜 뭘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힘이 없어서 정복당하기는 했지만 너를 마음속으로 존중할 생각은 없으니까 죽이던 살리던 맘대로 하라 정도의 의사표현에 불과했기에 손호가 대놓고 개기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어서 가만히 놔뒀던 것. 그리고 손호 본인도 어차피 자기 기반이 없는 걸 아니까 무슨 짓을 해도 사마염을 직접 죽이려고 들지만 않으면 사마염이 성격파탄자가 아닌 이상 자신을 내버려둘 거라는 걸 알고 막나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말하자면 개인 수준에서는 재치도 있고 담력도 있는 인물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게 황제였던 자로써 패기있는 모습이라 보기는 어렵다. 손호가 일반 황족이었다면 멋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 사마염은 부패하긴 했지만 기본적인 군주로서의 성격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낙양으로 간 지 4년 만인 284년에 죽었고, [[북망산]]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훗날 [[백제]]의 [[의자왕]]이 묻히게 된다. 또한 유선이나 [[고구려]]의 [[연남생]], [[연남산]] 형제도 여기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