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조 (문단 편집) === 난세의 시작 === 순조의 치세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16년]]에는 탐보라 화산 분화로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한 인구 급감소, [[1832년]]에는 [[영국]][* 이때 이들은 자신들을 '영길리국'(英吉里國)이라 칭했다. [[잉글랜드]]를 [[한자]]로 음차한 것.]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무력으로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핑계로 교역을 거부하고 그들이 요구한 물자와 식량을 제공하고서 빨리 내보내는데 급급했다.] 물론 이전에도 다른 이양선이 왔지만 교역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암허스트호의 선원들 중 1명이 한자를 잘 알아 글을 써서 대화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양선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해당 지역 [[수령]]들은 이들에게 손짓과 발짓으로 떠나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였다. 이양선들 역시 교역 요구가 목적이 아닌 해양 탐사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마찰이나 충돌 없이 빨리 철수하고 떠났다.] 순조는 뒤에 즉위하는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과는 달리 나이나 [[조선/왕사|혈통]]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 헌종과 비교해보면 헌종이 혈통은 더 나았을지 모르나 나이는 헌종보다 많았고 혈통으로는 철종보다 훨씬 앞섰다.] 순조 본인의 권한은 강한 편[* 자기 가족들 및 종친들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목소리를 크게 냈고 관철시킨 것도 많다.]이었으며 정치적인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수렴청정을 받던 초기 3년 정도까지의 인사 등은 선왕 [[정조(조선)|정조]]의 스타일과 최대한 유사하게, 나름 균형있게 유지되었다. 순조는 친정 초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이었고 순조 11년([[1811년|1811]])에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는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 다만 벽파 숙청 이후 열심히 정사를 본 기간에도 국정 장악엔 별 관심이 없어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이 터진 다음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 우유부단함과 무기력함을 보였고, 김재찬·남공철·심상규·이시수 등 신료들이 있는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겨 [[세도정치|세도 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엔 김재찬 등 [[안동 김씨]]면서도 입김이 닿는 대신들을 통한 간접적 막후 통치를 할 수 있었으나 순조 32년([[1832년|1832]]) [[김조순]] 사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점차 [[안동 김씨]]가 아예 모든 것을 다 씹어먹어버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 정치]]'''가 된다.[* [[안동 김씨]]가 본격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는 것은 [[헌종(조선)|헌종]]조부터다.] 순조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말은 '대표되는'이라고 썼으나, 사실 거의 모두 [[안동 김씨]] 가문이였다.] 척신들을 중심으로 한 일당 독재 구도가 등장하는데, 순조가 선왕들과 달리 신하들을 단속하는데 신경쓰지 않았던 탓이 크다. [[영조]] 초기에는 [[숙종(조선)|숙종]]부터 [[경종(조선)|경종]]까지 이어진 과열된 붕당 ([[노론]]VS[[소론]]/[[남인]])으로 조정이 거의 피바다가 되었는데 이를 완론 [[탕평책]]으로 제어해서 영조 후기에는 척신 정치로 귀결되었지만 영조는 그 덕분에 정치 안정을 이루었고 『천의소감(闡義昭鑑)』으로 왕위에 관한 정당성도 크게 확보했다. [[정조(조선)|정조]]는 준론 [[탕평책]]으로 [[남인]], [[시파]]와 [[벽파]]의 정쟁이 이어졌지만 정조가 [[채제공]]과 [[김종수(조선)|김종수]] 등을 동시에 우대하면서 지속적 관리를 하여 조정의 균형이 일신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숙종(조선)|숙종]] ~ [[영조]]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한 당파의 일당전제화로 인한 당파 정치의 붕괴[* 신하들에게 꼼짝 못하는 임금들로 묘사되는 사극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 후기 왕들은 후견 세력이 미미했던 철종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당파 싸움을 이용한 환국(정당교체)을 통해 왕권이 지속적으로 강해졌고, 영조 시절에는 아예 서슬 퍼런 태종 시절에도 왕에게 대들던 근성을 보이던 사관들이 [[조선/왕사|임금]]에게 벌벌 기는 상황까지 연출된다.]는 왕 한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몰리게 만들다 보니 왕이 조금이라도 관리를 안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후대에 유능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영조와 정조는 바로 이런 점에 상당히 신경을 써서 [[권신|권세가 강한 신하들]]이 나오기는 했어도 왕이 그때 그때 선 넘는 신하들을 제어해 더 큰 사고를 막았다. 하지만 순조에 이르러 관리에 손을 놓자 붕 뜬 통제가 드디어 [[세도정치|일개 세도 가문]]들에 넘어가면서 조선 정계는 [[후지와라|소수 가문간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개막장]]으로 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