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조 (문단 편집) == 평가 == [[정조(조선)|정조]]의 무기력한 어린 아들 [[이미지]]와 병약했다는 이유로 존재감이 매우 옅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박약한 의지로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암군]](暗君)'''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과장 좀 보태자면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임까지도 가지고 있는 암군이라는 말도 있다. 특히 순조는 중흥군주(영조-정조) 뒤의 수성군주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무기력함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커진다. 순조는 선대로부터 (심지어 증조할머니에게도)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자 수업 기간이 없다시피하게 너무 어린 나이(10세)에 왕위에 올랐다.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수렴과 본인 스스로의 역량으로 이를 극복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청년기를 넘기면서부터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효명세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단명한 뒤 사실상 국정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19세기 조선을 좌지우지한 [[세도정치]]를 낳았다. 30년 넘게 통치한 선왕 두명의 케이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바로 [[세종대왕]]과 [[중종(조선)|중종]]. 세 군주 모두 30년 넘게 권좌를 유지한 수성형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극도로 큰 차이가 있다. 세 임금 모두 똑똑한 [[세자]](문종/인종/효명세자)는 [[요절]]하면서 [[왕실]]은 어린 계승자([[단종(조선)|단종]]/[[명종(조선)|명종]]/[[헌종(조선)|헌종]])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단명하는 바람에 방계 중의 방계(~~[[세조]]~~/[[선조(조선)|선조]]/[[철종(조선)|철종]])의 인물이 즉위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굳이 따진다면 세조보다는 그의 손자인 [[성종(조선)|성종]]이 방계 승통에 가까울 것이다.] 우선 [[세종대왕]]의 경우 순조와 비슷하게 세자기간이 매우 짧았고 피를 싫어해 옥사도 벌이지 않았지만, [[황희(조선)|황희]]처럼 신뢰가 있는 대신은 [[비리]]가 있어도 중용하였다. 또 세자([[문종(조선)|문종]])에게 오랫동안 실권을 준 대리청정을 맡겼다.[* 세종의 사례는 대리청정의 첫 선례로, 조선 초기의 정치 혼란으로 인한 상왕제를 사실상 끝냈다는 점과 후대에 이어지는 전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순조는 하늘도 무심하게 효명세자가 단명해버린다.] 문종의 요절로 [[단종]]이 승계한 것도 [[효명세자]]의 요절로 [[헌종(조선)|헌종]]이 승계한 것과 유사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세종은 선대에 이미 [[소헌왕후]]의 장인인 [[심온]]을 숙청해 외척의 싹을 잘라놨고[* 물론 심온과 그 가족들 입장에선 말 그대로 단지 세자의 장인이란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죽은거라 현대 기준으로 보면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순 없다. 당장 외척으로 준동 안하고 조용히 산 사람들도 많기 때문.] 또 세자기간이 짧았다고는 하나 태종이 승계 후에도 사실상 [[상왕]] 통치를 3년 정도 했기 때문에 통해 세종은 국왕이지만 사실상 대리청정과 유사하게 국정 경험을 다졌던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당초 스물이 다 되어 즉위해 한국사 최대의 명군으로 남은 세종대왕과, 고작 10여살 때 임금에 올라 암군에 그친 순조를 단순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중종(조선)|중종]]의 경우 [[중종반정|반정]]이란 이유 때문에 부득이한 측면도 있지만 순조와 비슷하게 신하들에게 꽤 휘둘렸으며[* 중종의 경우 [[조광조]]의 사례에서 보듯 우회적으로 정국을 주도한 면모도 있었다. 반면 [[김조순]]을 비롯한 순조를 모신 [[신하]]들의 경우, 무리한 욕심 없는 처신이라는 측면에서는 중종 때 신하들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 말년에는 [[인종(조선)|인종]]에게 대리청정을 거쳐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공통 된다.[* 물론 중종의 경우에는 죽기 하루 전날 인종에게 승계하였으니 실질적으로는 상왕제라 보기 어렵다.] 중종과 순조 모두 조선이 융성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시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중종 이후로도 조선은 300년 넘게 유지되었는데, 순조는 불과 사후 76년 후인 1910년에 [[경술국치|망국]]을 겪었다는 점. 중종과 순조의 시대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바로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 없었던 점이었다. 중종의 경우에는 [[옥사]]와 [[정치]] 혼란을 방기하면서 이에 실망한 많은 신하들이 [[사직]]을 하거나 과거에 들어가도 [[관직]]을 거부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란 말마따나 [[사림]]들은 이 때를 노려 [[성리학]]을 고도로 발전, 학파를 형성해 문하에 [[제자]]들을 양성하며 세력을 늘렸다. 명종 후기부터 옥사가 잦아들면서, 사림들은 중앙 정계에 대한 진출이 쉽게 이루어졌고 선조 시기가 되면 사림 세력은 조선에서 주류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반면에 순조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았다. 영조 대 당시 양대 [[붕당]]이었던 [[노론]]은 [[삼수의 옥]], [[소론]]은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으로 당파색은 완전히 사라져서 탕평당이라는 당파로 유지되었다. 정조는 붕당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이른바 [[의리]] 탕평을 통해 [[벽파]](청명당)가 주요 세력이 되고 [[남인]]도 다시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준론 탕평'은 깨지게 된다. 벽파는 즉시 남인을 [[신유박해]]로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몰아냈으나, 벽파도 역시 버팀목이었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사망하고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김한록의 '팔자흉언'이라는 죄명을 씌어서 몰락하게 된다. [[시파]](구 탕평파)의 영수 격인 김조순은 치열한 권력투쟁보다 권력 분점과 그에 기반한 정치적 입지 유지에만 주력했다. 더불어 순조의 느슨해진 [[외척]]에 대한 경계는 기어이 [[세도정치]]의 서막이 되었다는 평가. [[임상옥]] 등으로 대표되는 중인, 상인계급 또한 공명첩을 통해 기성질서에 편입되며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세력화에 실패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