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문단 편집) === 개화기 ~ 일제강점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21130_213332.jpg |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eoulsouthgate.jpg|width=100%]]}}} || || {{{-1 {{{#fff '''숭례문(1890년대)'''}}}}}} || {{{-1 {{{#fff '''[[한양도성|{{{#fff 한양도성}}}]] 성곽이 연결되어 있는 숭례문의 원형 모습.'''}}}}}} ||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외국인들이 들어오고, 한양이 본격적으로 서양 세계에 알려지면서 한양에 들어오는 정문인 숭례문 역시 서울에 관광 온 외국인의 입을 통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대표적으로 퍼시벨 로웰(percival lowell)은 1883년 조선을 여행한 기행문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서울에 입성하는 순간의 숭례문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이윽고 가파른 길을 벗어나자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고 집들도 더욱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일행이 한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거기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도시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 나는 그처럼 아름답고 색다른 풍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본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내 어릴적 꿈을 상기시켜 주는 장면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마술사가 빚어 놓은 무엇처럼 내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숭례문’[영원한 의식의 문(The Gate of Everlasting Ceremony)]이었다. 남문인 숭례문은 서울을 에워싼 여덟 개의 입구 가운데 하나이다. 문 양편에는 마치 팔을 펼친 듯 위가 들쑥날쑥한 톱니 모양의 벽이 뻗어 있었고, 벽 너머로 기와지붕이나 초가지붕을 한 나지막한 단층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The trail gradually became steeper, entered a defile, and passing through a cut in the hills emerged upon other suburbs more densely populated than those below. The travel increased, the house thickened; we turned a corner, and the great walled city of Korea lay spread out at our feet. / I have seen sights as beautiful, as strange, before; but I never beheld anything that so completely realized the fancies of my boyish dreams as what I stood gazing upon then. There they all lay spread out before me as if conjured up to life, —the imaginations of the time when, as a lad, my thoughts sped away from the pages of the "Arabian Nights" to the dreamy Orient. In front of me rose the south gate, —by name, "The Gate of Everlasting Ceremony,"—one of the eight clasps of the city's girdle. On either hand stretched a crenellated wall, encircling as with an arm the spot it loved. Protected within, nestling to it for safety from without, huddled the low one-storied houses, —a sea of roofs, some tiled, some thatched. [[https://archive.org/details/chosnlandmornin00lowegoog/page/n111/mode/2up?view=theater|archive]]] >---- > Percival Lowell, "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6, 76p. (조경철 역,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 한편, 서양에서 랜드마크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숭례문의 의미도 단순히 관문이 아닌,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대표한다는 의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숭례문을 한국을 홍보하는 엽서 등에 삽입하면서 숭례문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표상 중 하나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숭례문의 성곽이 헐린 것은 그 존재 의미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1907년 숭례문의 좌우 성곽이 헐렸으며[*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성벽같이 생긴 담벽이 바로 숭례문 성벽이다.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보도블록에는 성돌이 박혀있다. 성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놓은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숭례성터길이다.][* 여담으로, 이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2008]]년 숭례문 복원할 당시 숭례문 옆 아스팔트 도로 위에다 붉은색으로 숭례문을 연결한 [[서울성곽|한양도성]]이 지나간 자리를 성돌 모양으로 표시해놨었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 재포장으로 인해 지워진 상태이다.]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등이 고종에게 교통에 방해되므로 철거하자고 건의하여 이루어졌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電車)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門樓)의 좌우 성첩(城堞)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線路)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4403030_001|고종 44년 3월 30일]]] 같은 해 10월 요시히토 황태자의 방한이 있었는데, 이와 연결지어 황태자의 방한과 맞추어 성벽을 헐었다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는 설이다. 숭례문은 양팔을 잘리고 도로 한 가운데에 고립된 모양새가 되었다. 한편, 1907년 8월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일제의 해산 명령에 반발하면서 벌어진 전투인 [[남대문 전투]]에서는 하필 숭례문을 일제가 차지해서 싸우는 바람에(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 성벽이었기 때문이다.) 숭례문에서 벌어진 최초의 실전 전투가 일제의 방어전이 된 씁쓸한 일도 있었다. 이로써, 숭례문은 서울의 관문으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상실하고 관광물/랜드마크라는 정체성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제 강점기로의 전환과 잘 대응된다. 이후, 서울의 관문 기능은 1900년 건립된 남대문역, 1925년 건립된 [[서울역/역사|구 서울역]]이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다만, 서울역이 절묘하게도 숭례문을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져서 전통적 관문 및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이 대신 강화되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 이후에도 숭례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양도성|도성]]과 함께 서울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문학을 비롯한 여러 대중매체에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숭례문의 신세 한탄을 빌어 고립된 숭례문에 대한 측은지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오늘은 ○○ 행차의 자동차 바람뿐이오 미국 관광단의 인력거 행렬뿐이니 신세가 이 꼴에 무슨 소리를 하오리까". "구문팔자타령(九門八字打鈴)-남대문(南大門) (3)" , <동아일보>, 1928년 4월 26일.] 일부에서는 민족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 발표된 <남대문 타령南大門打鈴>은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치안 방해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한양성중 사대문에 남대문이 으뜸일세 >파루 소리 장단 맞춰 열고 닫던 문도 좋다 >여는 때는 새벽바람 닫는 때는 저녁 연기 >만호 장안 너만 믿고 잠꼬대도 깊었었다 >넝쿨넝쿨 푸른 잎이 천만년을 기약더니 >편갈리고 발이 잘려 열린 채로 해가 가네 >열렸거든 닫히거라 닫혔거든 열리거라 >닫던 사람 어델 가고 열던 사람 오는구나 >---- ><남대문 타령南大門打鈴>, 이고범 작사, 1933. 외국인들에게도 숭례문은 서울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결핵 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료 선교사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이 기획한 크리스마스 실(1932) 도안에서 숭례문과 황궁우가 등장하는데, 숭례문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조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그림"임과 동시에,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임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엽서에서 숭례문은 서울의 상징이었으며 이는 일제에서 만든 엽서도 마찬가지였다.[* 목수현, "관광 대상과 문화재 사이에서 -숭례문, 황궁우, 경회루를 통해 본 근대 ‘한국’ 표상 건축물의 위상-",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9집|15~42쪽|2014.11] 한국인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 않는 사실이지만 일제가 숭례문을 보존한 이유에는 이를 일종의 [[개선문]]처럼 여긴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실상 실권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제국 말부터 일본은 교통을 위해 숭례문도 철거하려고 했지만,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온 성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군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입성한 문입니다. 조선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라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 실려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숭례문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한양 점령'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여겼으며, 훗날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면서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을 이뤄낸 자신들의 역사를 빛내는 시초의 건축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이유도 이 이유가 크다. 같은 이유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과한 [[흥인지문]] 역시 철거가 취소되었다. 숭례문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관문인데다 서울의 역사에 맞먹는 시간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쌓임에 따라 매우 다양한 기억과 복합적인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35년의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당시 일제 및 총독부는 숭례문을 일제 치하 조선의 긍정적(소위 내선일체적) 상징으로서 여겼다면, 광복을 기다리는 어떤 한국인들은 숭례문을 나라를 잃은 민중을 대변하거나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대상으로 여겼다. 당시 일방적 갑이었던 일본 측의 역사적 고려는 숭례문을 보존하는 선택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일제가 물러나면서 숭례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결과는 좋았다|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 셈이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불국사]]를 태워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