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문단 편집) === 숭례문(崇禮門) ===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왕조가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반영하여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양 도성의 주요 성문에는 [[오행]](五行) 사상에 따라 해당 방위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 즉 '''오상(五常)'''을 이루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사단(四端)인 인/의/예/지로 한정하기도 한다.]을 대응시켜 이름을 지었는데, 특히 동문, 서문, 남문에 이러한 대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 동: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흥인(지)문]] * 서: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 '''남: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 북: 같은 원리대로라면 "지(智)" 자가 대응되나, 북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문이어서 그러지 않았다. <실록>에 의하면 숙'''청'''문(肅'''淸'''門)이라 부르다가[* 첫 기록: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509024_002|태조 5년 9월 24일]]][* 승정원일기에서는 순조 대까지 발견] 언젠가부터 숙정문(肅靖門)[* 첫 기록: [[https://sillok.history.go.kr/id/kka_11806029_002|중종 18년 6월 29일]]]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훗날, 숙종 대에 탕춘대성과 함께 홍지문(弘智門)이 세워지면서 빈자리를 메꾸었다. * 중앙 : 신(信)은 한양 한복판에 위치한 [[보신각]](普信閣)이다. 그러나 보신각 역시 고종 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의 이름인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인다'는 뜻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군자존덕성이도문학)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면서도, 묻고 배우는 것을 길로 한다. > >[[致]][[廣]]大而[[盡]][[精]][[微]]. (치광대이진정미) >넓고 큼에 이르면서도, 정미함을 다하며 > >[[極]]高明而道中[[庸]] (극고명이도중용) >고상하고 현명한 것에 이르면서도, 중용을 길로 여기고 >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옛 것을 쌓아가면서도, 새 것을 알며 > >[[敦]][[厚]]以'''[[崇]][[禮]]'''(돈후이숭례) >'''예를 높이는 것'''으로써, 돈독하고 두터워진다. > >[[是]][[故]] [[居]]上不[[驕]] [[爲]]下不[[倍]](시고 거상불교 위불불부) >이 때문에 윗사람이 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되어도 배반하지 않는다. >---- >《[[중용]]》 27장 中 [[정도전]](鄭道傳)의 시문집인 『삼봉집』(三峯集)[* 현전하는 본(本)은 1791년(정조 15) 보완]에서는, 도성 팔문의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였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24A_0110_010_0010&solrQ=query%E2%80%A0%EC%88%AD%EB%A1%80$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332$solr_curPos%E2%80%A0107$solr_solrId%E2%80%A0BD_ITKC_BT_0024A_0110_010_0010|#]] 공식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른 진술 중 정도전이 권중화 등과 함께 한양의 도시계획을 구상[*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309009_002|태조 3년 9월 9일]]]하고 경복궁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어 바친 것[*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410007_002|태조 4년 10월 7일]]], 한양의 팔경시(八景詩)를 지어바친 것[*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704026_002|태조 7년 4월 26일]]] 등이 교차 확인된다.[* 하지만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한양의 주산을 두고 논쟁하였으며 무학이 "200년 후를 지켜보라"고 발언하였다는 등의 훗날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야사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삼봉집』에서는 임진왜란을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또한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 아니다.[[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810026_003|세종 8년 10월 26일]]]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것을 인용하였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1A_0150_020_0170&solrQ=query%E2%80%A0%EC%88%AD%EB%A1%80$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332$solr_curPos%E2%80%A0161$solr_solrId%E2%80%A0BD_ITKC_BT_1301A_0150_020_017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