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문단 편집) ==== 기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010100.jpg|width=100%]]}}}|| || 도성도(대동여지도)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4502|#]] || 남대문이라는 이명이 알려주듯, 도성의 남쪽 대문으로서 기능하였다. 한양은 지형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사이로 문을 냈는데 북쪽은 북악산이, 남쪽은 남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숭례문은 남서쪽에 자리잡았다. 숭례문은 흥인문과 함께 도성의 가장 중요한 두 관문으로 여겨져[* 숭례문, 흥인문은 각각 남대문, 동대문으로 불렸으나 돈의문은 옛날에는 서대문이 아닌 새문(신문新門)이라고 불렸다. 규모도 평범한 1층 문루였다.] 문루 또한 2층으로 크고 화려하게 지었으며, 통행량도 가장 많았다. 숭례문은 주로 한양의 서쪽 교통을, 흥인문은 주로 한양의 동쪽 교통을 담당하였다. 숭례문은 국토의 북쪽으로는 의주로, 남쪽으로는 삼남로 등의 최종 관문이었다. 의주로는 가장 중요한 외교국이었던 중국과 통하는 길이며, 무악재를 넘어 돈의문 바깥에 있던 모화관(慕華館), 영은문(迎恩門)을 따라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정식 루트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대외적으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대표하는 이미지 역할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명 동월(董越)[* 1448년 홍치제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관리]의 <조선부(朝鮮賦)>에는 도성문 중 숭례문만이 따로 기록되어 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B001A_0020_010_0010|#]]) 삼남로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통로로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가는 길, 임금의 행차길 등 다양한 기능을 맡았으며 특히 비중 높은 삼남 지방의 세곡과 물자가 마포(麻浦) 등 큰 나루터에서 하역하여 도성으로 수송되었다. 태종 대에는 물류 운송을 편하게 하기 위해 숭례문 근처 만초천(蔓草川)까지 운하를 뚫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도성 내에서는 광화문으로 뻗는 [[육조거리]], 동서 방향으로 한양을 꿰뚫는 운종가(雲從街)와 함께 한양의 핵심 도로였던 남대문로(현재는 태평로가 뚫려있어 위상이 이전보다 축소되었다.)로 이어졌으며 그 끝에는 청계천에서 가장 통행이 많던 [[광통교]](廣通橋)와 한양의 종루였던 [[보신각]](普信閣)이 있었다. 성문 바깥으로는 칠패(七牌) 저자가 들어섰다. 1896년 도시개조사업으로 가가(假家)가 모두 정리된 이후에는 선혜청(宣惠廳) 내부에 창내장(創內場, 현 남대문 시장)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외에, 숭례문은 한양의 비보풍수(裨補風水; 풍수 상 부족한 요소를 인위적으로 보충함)와 관련하여 여러 기능을 담당하였다.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오른팔은 지세가 낮아 기가 허(虛)하다 하여 바깥에 연못(남지南池)을 팠고, 그 안에는 불을 제압하기 위해 부적이 들어간 현무 조각을 넣기도 하였다. 또한, 음양사상에 관련하여 가뭄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숭례문(남문; 陽)을 닫고, 숙정문(북문; 陰)을 열어 음기(陰氣)를 강화하고[*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606005_002|태종 16년 6월 5일]]] 장마가 시작되면 다시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