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문단 편집) ==== 구조 ==== 숭례문은 견고한 육축 위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가진 성문이다. 흥인지문, 팔달문 등과 함께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성문 중 최대 규모이다. 흥인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공포 구조 등을 살펴보면 숭례문은 조선 전기 양식, 흥인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흥인문은 고종 당시 문루를 중건했기 때문이다.) 숭례문의 경우 전체적으로 장식이 소박하고, 부재가 굵고 짜임이 건실하여 조선 초기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2층 잡상의 개수는 9개, 1층 잡상의 개수는 7개이다. 숭례문의 현재 단청은 1961년 ~ 1963년 보수 당시 발견된 옛날 패턴을 참고하여 63년 당시 채색된 버전에 가깝게 복원하였는데, 이외에도 숭례문은 54년, (63년), 70년, 73년, 88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단청을 다시 칠하면서 문양이 조금씩 변화하였기에 그 중 어느 것이 원본이다라고 하는 것이 조금 무의미한 측면이 있다. 다만 63년의 것이 유일하게 고증 비슷한 걸 한 사례이기에 복원 당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른 조선 초중기 건물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단청과 비교했을 때 조선 초 단청에 가깝기에 고증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 편. 최근 복원된 창경궁 명정문의 단청과 비교해볼 수 있다. 2010년 복원 당시 밝혀진 사실로 숭례문의 원래 기단은 지금의 지면보다 1m 60cm 정도 아래에 있었다. 즉 15세기 무렵의 도로는 현재보다 훨씬 낮았고, 상대적으로 숭례문의 성벽은 더 높았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기단이 묻혔고, 안그래도 특히 흥인문이 행차 때마다 흙을 퍼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기단을 낮추라 하였으나[*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0011025_003|영조 즉위년 11월 25일]]] 지반 안정성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복구 작업 시에도 구한말과의 연속성, 그리고 지반 안정성 등 다양한 이유로 지반은 드러내지 않은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