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인 (문단 편집) ==== [[아메리카 원주민]] ==== 식인이 국가적으로 자행된 경우로는 대표적으로 [[아즈텍 제국|아즈텍]]과 [[이로쿼이]]를 들 수 있다. 아즈텍의 경우 식용으로 삼을 거대 반추동물 가축이 없어서 단백질과 지질을 인간을 먹어서 보충했다는 이론이 있는데, 테노치티틀란이 호수 가운데의 섬이라는 점을 망각한 거라 반박하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반론이라고 하면 1978년 베르나르드 R. 오르티스 데 몬텔라노(Bernard R. Ortiz de Montellano)의 [[https://science.sciencemag.org/content/200/4342/611|논문]]이 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과 식인은 (기근 등 식량이 부족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곡물 추수기간 등 식량이 풍족한 기간에 더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즉, 아즈텍인들에게 식인은 (미국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칠면조 요리를 먹는 수준의) 종교적, 문화적 행사에 가깝지 '''단백질 부족에 따른 불가피한 생존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뜻'''으로 해석하며, 17세기 당시 기록에 따르면, 테노치티틀란이 위치한 텍스코코 호수 인근의 비교적 '''작은 [[호수]]'''였던 소치밀코(Xochimilco) 호수와 찰코(Chalco) 호수에서는 '''1년에 잡히는 [[물고기]]의 양이 각각 100만 마리 이상일 정도였다고 하며'''(출처 : Freshwater Fishes of North America: Volume 2: Characidae to Poeciliidae, Melvin L. Warren, Jr., Brooks M. Burr) 실제로 당시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어업 유적이나 도구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거기다 아즈텍 제국은 [[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테치치라고 불리는 소형견종. 오늘날 [[치와와]]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반론도 있다.]와 [[토끼]], [[칠면조]], [[오리]] 등을 식육용으로 길렀으며 특히 칠면조는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가축화와 사육에 성공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멕시코 특유의 친환경 농사방식인 치남파(Chinampa) 농업으로 인하여, 지력이 고갈되는 일도 거의 없이 농업 생산량도 풍부한 편이었다. 또한 [[카카오]] 항목에서도 나타나다시피 이러한 식량들을 거래할 [[시장(경제)|시장]]과 화폐기준까지 있었다는 점에서 가루가 나도록 까였다. 오히려 '1970년대 현대 멕시코인들의 식단보다 과거 아즈텍인들의 식단이 훨씬 더 풍족했다'는 주장까지 언급하는 [[https://www.nytimes.com/1977/03/03/archives/experts-on-aztecs-deny-withholding-cannibalism-facts.html|학자]]가 있을 정도이다. 이에 대한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반론(식인문화의 수수께끼, 1985)은 이렇다. * 아즈텍인들이 칠면조로 단백질을 얻으려면 사료가 [[돈지랄|고기로 전환되면서 나오는 90%의 손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아즈텍에 잉여곡물이 충분했는가? * 개한테 콩과 옥수수를 먹여서 살을 찌우는 건 [[육식동물|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 몬텔라노와 다른 학자가 수집한 아즈텍인들의 식품 목록을 보면, 주곡인 콩과 옥수수, 채소, 과일 외에 개-칠면조와 수많은 야생동물이 있다. 사슴, 아르마딜로, 물새, 들새, 물고기, 방울뱀, 쥐, 벌레, 물파리가 호수 위에 낳은 알까지 걷어서 먹었다. 몬텔라노는 "이렇게 다양한 대체식품이 있으니 인육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다양한 대체식품을 먹는 사람들이 인육이라고 못 먹겠는가?"라고 묻겠다. 그리고 물파리 알까지 걷어먹어야 했다는 건 그만큼 단백질이 부족했다는 증명이다. * 위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반경 20마일 안에 거주하는 백만 명에게 분배할 수 있는 짐승고기와 생선, 새의 고기는 1년에 1인당 몇 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 구세계의 지배층은 포로를 살려두고 일(가축을 돌보게 하거나, 가축의 사료를 생산하게 하거나, 사냥을 하거나)을 시킴으로서 고기를 더 생산할 수 있었지만 아즈텍에서는 살아있는 포로를 활용해서 고기를 생산할 수 없었다. * 정복한 지방에서 잉여곡물을 가져와 더 많은 칠면조를 키우려고 해도 곡물을 운반할 수단이 사람의 등짐밖에 없는데, 문제는 [[적자|일꾼이 왕복하면서 먹는 곡물의 양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하는 양보다 더 많다.]] * 옥수수 수확철에 많은 포로를 잡아먹은 건, 그때가 "식량이 가장 부족한 시기"가 아니라 "희생물을 살찌우기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사료로 삼아서 잡아먹을 포로를 가축처럼 살찌운 거다. 대부분의 희생물은 전쟁포로인데, 배고픈 계절은 멕시코 분지의 겨울 우기이고 수확기는 건기이다. 전쟁은 당연히 우기가 아니라 건기에 하는 행사다. 건기에 적지에 쳐들어가면 잘 익은 적의 곡물로 군량을 보급하고 빼앗은 곡물을 포로에게 먹이고 포로에게 등짐을 지워 운반해온 뒤 포로를 잡아먹을 수 있다. * 결론: 아즈텍인들의 식인은 단백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포로를 살려서 노예로 삼는 것보다 죽여서 고기로 먹는 쪽이 정치,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즈텍은 인구 500만의 제국이었고, 테노치티클란의 거주 인구는 30만 명에 불과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도시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또 모를 일이긴 하지만, 현재는 대체적으로 인신 공양은 확실시되고 있으며 식인도 규모 논란만 있을 뿐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이것들은 태양신 신앙에 의거한 종교적인 행위로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육의 취급이 이렇게 종교적인 행위로서 이루어져서 도리어 인육을 먹을 법한 상황에서도 먹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스페인]]군과 격렬하게 충돌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아즈텍군 병들은 동료의 시체가 지천에 널렸어도 나무 껍질로 연명했다는 것이 나온다. 다만 적의 시체는 기꺼이 먹었다. 그래서 아즈텍은 사실상 종교행사 때가 아니면 아즈텍인들이 인육을 먹을 일도 없었다는 일부의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아즈텍의 인신공양은 중국의 [[은나라]]와 비슷하게 [[타킨 독트린|공포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중론이다. 아즈텍은 [[사제(성직자)|사제]]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적군 [[포로]]의 팔다리를 구속한 상태에서, 흉부를 [[흑요석]] 칼로 베어낸 후 [[심장]]을 꺼내어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시체는 피라미드 계단에서 굴려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는 당시 포로가 되었던 [[스페인]] 병사들의 기록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일명 '해골의 벽'이라고 불리는 두개골과 자잘한 뼈들을 석회로 붙여서 '촘판틀리'라는 구조물을 만들기도 했는데 콩키스타도르가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하면서 파괴되었다가, 2017년에 멕시코시티에서 [[아즈텍]] 피라미드 지하에서 새로운 해골탑과 수백 개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추가 발굴과 함께 이것이 촘판틀리 였으며, 이 해골 중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과 어린아이, 노인의 두개골 등이 발견되어 전쟁 포로 외에도 광범위한 인신공양이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9378641|멕시코시티 지하 아즈텍 신전서 지름 6m 원통 해골탑 발굴]] 아즈텍의 [[틀랄록]] 숭배는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오로지 어린아이들만을 제물로 바쳤다[* [[케찰코아틀]]도 아이들을 제물로 받았지만, 오로지 아이들만 받는 신은 틀랄록이 유일했다.] 또한 의식과정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기에 아즈텍인들은 아이들을 학대하고 손톱을 뽑으며 잔인하게 고문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제사가 1년에 몇 번이나 있었고 원주민 출신 역사가 알바 익스틀란소치틀은 '매년 전체 아이들의 5분의 1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https://www.dogdrip.net/221737757|틀랄록의 인신공양을 묘사한 글]] 그러나 이 기록을 남긴 익스틀란소치틀 부터가 아즈텍 멸망 이후 50년 뒤에나 활동한 인물인데다 정복자였던 에스파냐의 기독교식 교육의 영향을 짙게 받은, 사실상 에스파냐화된 현지인이었고 아즈텍이 있었을 당시에 에스파냐 측이 남긴 기록인 피렌체 문서에는 틀랄록이 어린아이만 제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없었기에 현재 익스틀란소치틀의 기록은 거짓으로 판명된 상태다. 여기에 단순히 인신공양만이 아닌 식인까지 같이 행해졌는데 나중엔 제물을 바치는 피라미드가 마치 [[정육점]]같이 쓰이기도 했다. 특히 제물의 팔과 다리는 별미라 하여 귀족이나 왕족만이 즐길수있는 별미였고, 몸통은 그대로 버려지기도 했다.[* 출처: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심지어 틀라카틀롤리라는 이름의 요리가 있었는데, [[틀락스칼텍]]인을 재료로 쓴다고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아즈텍 제국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틀락스칼텍은 아즈텍인들에게 '''인간 목장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과거엔 당시 아메리카엔 소나 말과 같은 대형 가축이 없었기에, 단백질 보충을 위해 식인 풍습이 인신공양과 함께 나타난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당시라도 물고기, 식육용으로 기른 [[개]], [[칠면조]], [[페커리]], [[강낭콩]]등으로 얼마든지 단백질 섭취가 가능했음이 밝혀지며 반박되었다. 다만 식인 풍습이 처음엔 종교적 목적으로 시행되었음은 검증되었다. [[작은 사회]]에서도 고기를 분배하는 권한은 추장이나 제사장이 가지는 고유의 권한이고, 때문에 제사장이 분배하지 않은 고기는 먹을 수 없다는 터부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유대교의 [[코셔]]나 이슬람의 [[할랄]] 역시 이와 같다. [[잉카 제국|잉카]]의 경우는 어린아이를 수장시켰고 실제로도 공식이 있었을 가능성은 드물며, 무엇보다도 반추동물인 [[라마]]를 키우고 있었기에 인육을 대체할 수단은 존재했다. 후자인 이로쿼이는 사실상 부족 단위였고, 아즈텍처럼 식민지를 관리하거나 노예를 부릴 만한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기에 전쟁이 나면 그냥 포로를 잡아서 먹어버리거나 죽여버렸다. 한 마디로 그들로서는 사용하지도 못할 [[노예]]로서의 가치보다는 [[잉여|육류로서의 가치가 더 낫다고 판단한 것.]] 어차피 유목 민족에게 노예는 그다지 쓰임새가 많지 않다. 다만 이로쿼이는 주변의 [[사슴]]이나 [[물고기]] 등을 사냥하여 고기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으므로 식인은 실질적으로 흔치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