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명기 (문단 편집) === 법규 === 우선 신명기에서 그리스도인 독자에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계명은 단연 십계명이다. 신명기는 출애굽기와 함께 십계명을 명시하고 있는데, 둘을 비교하자면 출애굽기가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전승을 담고 있으며, 신명기에는 (요즘 말로 하자면) 더 사회 교리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가령 안식일 계명의 경우 출애굽기는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2 (출애굽기 20장 11절)}}}이라고 설명하지만, 신명기는 그런 말이 없고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2 (신명기 5장 14절)}}}라고 설명한다. 또한 출애굽기 20장 17절은 이웃의 아내와 재산을 모두 "탐내서는"(חמד) 안된다고 말하지만, 신명기 5장 21절은 이웃의 아내는 "탐내서는"(חמד) 안되고 이웃의 재산은 "욕심내서는"(תִתְאַוֶּ֜ה) 안 된다는 세심한 단어 구분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21세기식 인권 담론과 동일시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신명기가 약자에 대해서 더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 문명은 인류사의 가장 오래된 문명이자, 구약성경 탄생의 배경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크고 작은 이웃 민족과 교류하고 경쟁하며 자신의 독특한 야훼 신앙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벌진시켰다. 그리고 고대 근동의 언어, 문학, 법률, 사상, 종교 등은 자연스레 구약성경 본문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겼다. 고대 근동 종교의 맥락에서 바라보면 신명기계 신학자들이 독특한 야훼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변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신명기의 문학적 삼단 구조가 고대 근동 법전의 구성과 같다. 기원전 18세기 고바빌론 왕국의 임금 함무라비의 법전은 고대 근동 전역의 법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함무라비 법전의 구성은 신명기와 같이 머리말(5-11장)에 이어 법전(12-26장)이 나오고, 축복과 저주(28장)로 마무리한다. 한편 신명기의 문학적 삼단 구조는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봉신계약과 많은 면에서 일치한다. 이 계약은 상하관계가 뚜렷한 충성계약이다. 곧 신명기는 하느님과 백성이 맺은 충성의 계약을 표현하는 데 알맞은 형식의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백성과 하느님의 '계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신명기 법전(12-26장)의 개별 조항도 고대 근동 법전의 일반적 방식에 따라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결의론적' 문장은(···한 경우, ··· 해야 한다) 수메르의 우르-남무 법전이나 고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정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이런 문장은 개별 조항의 법적 한계를 잘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이런 개별 조항들은 사건의 경과(20장 '전쟁에 관한 법'의 법조항 순서)에 따라 배열되거나, 법조항의 대상에 따라 '법조항 묶음'으로 존재하고(판관에 관한 법, 레위인에 관한 법 등), 이 묶음은 위계(하느님-선택된 백성-경제법)에 따라 배열되는 점도 고대 근동의 법전과 같다. 그리고 법전의 문학적 단위가 변화할 때, 특정 주제어가 제시된다거나 특정한 도입구가 존재해서 표지의 역할을 하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법률을 실제 사용할 때도 편래힜을 것이고, 법의 전체나 일부를 종교적 축제 때에 공표하는 데도 유용했을 것이다. 또한 법률의 암기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문학적 유사성 외에도 개별 조항의 의미와 배경을 이해하는 데 고대 근동 세계에 대한 지식이 널리 쓰인다. 이렇게 고대 근동의 법전과 신명기 법전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신명기 법전의 '고대법'적 성격을 더 잘 알 수 있다. >주원준, 신명기 주해 中 또한 십계명 외에도, 고대 근동 법전의 형식으로 다양한 계명을 신명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의 구조에서 볼 수 있듯 ㄱ. 서언 ㄴ. 좁은 의미의 법전 ㄷ. 맺는말(축복과 저주 포함)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신명기 5-28장은 이 구조와 비슷하게 서언(5-11장), 법전(12-26장), 맺는말(28장)의 구조를 취한다. 또한 5-28장은 율법인 동시에 계약 체결 형식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특히 고려 대상이 되는 모델은 '히타이트' 종주(宗主) 조약이다. 히타이트 종주 계약은 ㄱ. 전문 및 역사적 서문과 원칙 선언 ㄴ. 게별 규정 ㄷ. 축복과 저주의 구조를 취하는데, 이 역시 신명기와 어느정도의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ㄱ 단계에서 히타이트 종주 계약은 주군이 봉신에게 베푼 역사적 은혜를 제시한다는 점(예: 나는 너에게 이러이러한 은혜를 베풀었다)인데 이는 신명기도 비슷하다. 다만 고대 근동 세계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해석하기 어려운 서술들도 많이 있다. 가령 전쟁에 관한 율법을 보자. 신명기는 "히타이트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모조리 전멸시켜야 한다"(20,17)고 말한다. 이는 마치 전쟁 중인 이스라엘인 독자에게 가나안인 전멸을 의도하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그러한 독법은 단지 현대인의 감수성과 충돌하는 것을 넘어, 신명기 본문이 의도하는 1차적 의미와도 거리가 멀다. 여기 제시된 민족들은 신명기가 저술될 때 이미 사라졌기에 이들 민족에 대해 유다인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현대 한국인이 거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실생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아래에서 게오르크 브라울리크가 지적하듯,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 오히려 신명기는 이미 쇠퇴한 과거의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을 말하지만, 독자와 인접하여 사는 인근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 언급을 피하는 곡예를 구사한다.[* 신명기는 에돔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 마라. 내가 세이르산을 에사우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들에게는 그들의 땅을 한 치도 주지 않을 것"{{{-2 (신명 2,5)}}}이라 말하며, 비슷하게 모압에 대해서도 "모압을 괴롭히지도 말고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도 마라. 내가 아르를 롯의 자손들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에게는 그 땅 어느 곳도 소유지로 주지 않을 것이다."{{{-2 (신명 2,9)}}}라고 한다. 현대 한국인이 애증을 느끼는 대상이 거란족이나 선비족이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임을 고려하면, 신명기가 얼마나 의도적이고 정교한 곡예를 구사하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가 서술하고 또 명령하는 가차없는 폭력에 의한 땅 정복은 하나의 관념적 구상물이다. 이것은 신앙이 요구하는 철저함의 상징,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역사 안에서 완수하신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__이민족 전멸 명령의 정형화된 적용은, 가나안 땅 점유 이후의 전쟁들뿐 아니라 훗날 유배로부터 이스라엘의 귀향과 관련해서도, 단호히 배제된다.__ >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곳 주민 전체를 전멸시켰다는 전쟁은, 그 가설을 신명기가 설계하고 그 가설의 성취를 여호수아기가 보도하지만, 역사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땅 주민들의 씨를 말린 잔혹하고 거룩한 전쟁이라는 표상은, 오래된 전승 요소들{{{-2 [예컨대 전리품 획득을 포기하고 신에게 사람·가축·물적 재화를 완전(절멸) 봉헌하는 승전, 이른바 헤렘}}}{{{-4 ''herœm''}}}{{{-2 전쟁에 관한 보도들. 이미 멸망한, 부분적으로는 전설적인 종족들 목록. 토박이 종족들의 추방을 포함한 땅 약속들]}}}을 의도적으로 체계화하고 일반화한다. 이 은유{{{-2 Metaphorik}}}의 개별적 모티브들{{{-2 (예컨대 군사적인 테러 위협)}}}은 아무래도 신아시리아의 선전포고와 언어와 표상 세계에서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스라엘 초창기의 '사실{{{-2 史實}}}적' 재구성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니, 이민족 절멸 계명은 문학적으로 처음부터 '''우화적·종교적'''인 의미에서 말해진 것이다. __과연 이 계명은 일러야 요시야 시대에서, 즉 이 계명이 적용되는 종족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서 유래한다.__ 기원전 7세기 말엽인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자기 땅의 큰 부분을 다시 잃었다. 적과 적의 소유물을 절멸시킨다는 헤렘이라는 개념은, 온 땅이 너희 소유이며, 너희가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넘겨주실 것이다, 또는 잃어버린 땅을 다시 마련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께 맞서는 모든 자에게 압도적 승리를 거두신다. 여호수아기의 경우도 비슷한데, 이 책은 (신명기계 가나안 땅 정복 설화의) 이 발생사적 단계에서 신명기와 조화를 이룬다. 가나안 땅 점유가 처음에는 정탐자들의 보고를 듣고 난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좌절되었고{{{-2 (신명 1,32; 참조: 9.23-24)}}}, 여호수아 주도하에 성공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2 (요약: 여호 21,43-45)}}}. 여기서 묘사하는 전투들의 철저성은, 여호수아기의 본디 의미에 따르더라도, 이스라엘 역사 초창기의 초토화 전술에 대한 사실{{{-2 史實}}}적 확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뢰의 철저성에 관한 설화적 상징이다. 이 철저한 하느님 신앙{{{-2 (이에 근거해 이스라엘은 초창기에 자기 땅을, 즉 자신의 행운을 얻었다)}}}의 전쟁 은유는 또한 훗날 수백 년간의 국가 존립 이후 실패한 역사의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 >모세가 요르단 동쪽의 아모리족 임금들과의 헤렘 전쟁을 약설{{{-2 略說}}}하기 전에, 신명기 화자{{{-2 話者}}}의 중간 언급은 뒤이어질 야훼와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들과 이민족 절멸을 세계사적 '통례적'인 현상들로 상대화한다. 야훼께서 편을 드셨던{{{-2 (2,21.22)}}} 이스라엘 이웃 종족들{{{-2 (2,12.23)}}}도 이미 당시의 전{{{-2 前}}} 주민들을 결딴냈다. > >'''신명기 7장'''의 관점에 따르면, 헤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애착의 한 귀결이며, 이스라엘이 하찮고 숫자 적고 힘없지만 야훼에게 선택된 것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역사적 행동의 도구가 되기 위함이다. 약속의 땅의 강력한 일곱 민족을 절멸(완전) 봉헌하라는 명령의 배경에는, 전쟁을 역사 안에서의 신의 '심판'으로 여기는 근동의 통상적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인종차별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며, 참으로 겨냥하는 바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끝끝내 신뢰해야 할 이 세상에서 하느님 행동의 절대주권임을 이 관념의 보편주의적·신학적 단초가 분명히 알려 준다. > >'''9,1-7'''에서 요르단 서쪽 땅의 정복이란, 은총과 공로에 관한 엄밀한 신학적 논증의 표현 수단일 따름이다. 이 논증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염두에 두고, 가나안인들의 악함을 평준화한다. __그러므로 양쪽 모두 땅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다.__ 이스라엘이 자신의 끊임없는 거부·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얻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야훼께서 우두머리 조상들에게 하셨던 맹세에 충실하신 덕분이다. 다시 말해, 순전한 은총의 선물이다. > >'''20,10-20'''의 전쟁에 관한 법은 __후대의 전쟁들과, 여호수아 지휘하의 유일회적 주민 절멸 정복 전쟁을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2 (20,15-18)}}}.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 (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__ > >'''29,21-27'''은 유배를 앞서 내다본다. 그때에는 다른 민족들에게 대항하는 일이 아예 없어질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묻다가, 자신들의 대답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역사 안에서 당신의 권리를 관철하셨다고 이스라엘과 함께 신앙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가나안의 일곱 민족을 그렇게 위험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스라엘을 자기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미혹할 터였다. > >이어지는 '''30,1-10'''의 귀향 예언은 유배된 자들을 이민족들 사이에서 데려옴과 관련하여, 이집트 탈출 때와는 달리, 하느님의 폭력 행위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__특히 약속의 땅의 새로운 소유에 관한 예언에, 이민족 절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__ 이스라엘의 집합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폭력 행위 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 >-게오르크 브라울리크, 같은 책, 259-261쪽 비슷하게, 신명기 22장 13-21절에 나오는 한 계명을 보자.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1>^^28^^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젊은 처녀를 만나, 그 여자를 붙들어 동침하였다가 들켰을 경우, ^^29^^그 여자와 동침한 남자는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에게 은 쉰 세켈을 주어야 한다. 그가 그 여자를 욕보였으므로,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그 여자를 내보낼 수 없다.||<^|1>^^2^^^^28^^ 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욕을 보이다가 두 사람이 다 붙잡혔을 때에는, ^^29^^그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욕을 보인 대가로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동안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습니다.|| ||<-2> 신명기 22장 28-29절 || 오늘날의 통념으로는 강간 사건의 '피해 여성을 위해' 가해 남성이 결혼 의무를 진다는 게 기이하게 보이겠으나, 고대 사회에서 이런 의무가 없다면 피해 여성의 앞길을 더 고통스럽게 할 우려가 있었다. 강간은 피해 여성의 혼삿길을 망쳐놓는 일이었고, 금욕서원{{{-2 (민수기 30장)}}}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후손 없는 여성은 당대 사회에서 엄청난 조롱을 받아야 했다. 특히나 이는 사회 하층민에서 더 큰 문제인데,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오늘날보다 훨씬 어려운 당대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대 근동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로 '고아와 과부'가 쓰였다.] 누군가는 혼삿길 막힌 이 여성을 책임져야 했다. 그렇기에 차라리 가해남성이 피해여성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인 구제 방법이었다. 때문에 아예 남성의 이혼 가능성까지 박탈하여 철저하게 여성의 생계를 보장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오늘날의 통념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사무엘기 하권의 한 일화를 이해할 수 있다. 사무엘기 하권 13장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윗 시대에 왕실에서 다음과 같은 범죄가 일어났었다. 왕자 압살롬이 이복여동생 타마르를 강간하고는 결혼도 하지 않고 버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피해여성 타마르는 가해남성 압살롬에게 강간보다는 피해자에 대한 무책임이 더 큰 범죄라고 항의한다.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1>^^11^^ 암논은 타마르를 끌어안으며 말하였다. “누이야,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눕자.” ^^12^^그러자 타마르가 그에게 말하였다. “오라버니, 안 됩니다! 저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추잡한 짓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13^^제가 이 수치를 안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또한 오라버니는 이스라엘에서 추잡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임금님께 청하십시오. 그분께서 저를 오라버니에게 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br]^^14^^그러나 암논은 타마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타마르보다 힘이 셌기 때문에 강제로 타마르와 함께 잤다. ^^15^^그런 다음 암논은 타마르가 지독히 미워졌는데, 타마르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타마르를 사랑하던 마음보다 더 컸다. 그래서 암논은 타마르에게, “일어나 나가라!” 하였다. ^^16^^그러자 타마르가 암논에게 말하였다. “__안 됩니다! 저를 내쫓는 것은 조금 전에 제게 하신 행동보다 더 나쁜 짓입니다.__” 그러나 암논은 타마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17^^시중드는 젊은이를 불러 “내 앞에서 이 여자를 밖으로 내쫓고 그 뒤에서 문을 걸어 잠가라!” 하고 일렀다. ^^18^^타마르는 긴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시집 안 간 공주들이 보통 그런 옷을 입었다. 암논의 시종은 타마르를 밖으로 내보내고 그 뒤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19^^타마르는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자기가 입고 있는 긴 겉옷을 찢었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울부짖으며 계속 걸었다.||<^|1>^^11^^그는 다말을 끌어안고, 함께 눕자고 하였다. ^^12^^다말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법이 없습니다. 제발 나에게 욕을 보이지 마십시오. 제발 이런 악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 주십시오. ^^13^^오라버니가 나에게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도 또한 이스라엘에서 아주 정신 빠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똑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발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 보십시오. 나를 오라버니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br]^^14^^다말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암논은 다말이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센 힘으로 그를 눕혀서, 억지로 욕을 보였다. ^^15^^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16^^그러자 다말이 암논에게 말하였다. "__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나를 쫓아내시면, 이 악은 방금 나에게 저지른 악보다 더 큽니다.__" 그런데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17^^오히려 자기의 시중을 드는 하인을 불러다가 명령하였다. "어서 이 여자를 내 앞에서 내쫓고, 대문을 닫고서 빗장을 질러라." ^^18^^암논의 하인은 공주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대문을 닫고서, 빗장을 질렀다. 그 때에 다말은 소매에 색동으로 수를 놓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공주들은 시집가기 전에는 옷을 그렇게 입었다. ^^19^^이제 다말은 머리에 재를 끼얹고, 입고 있는 색동 소매 긴 옷도 찢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목을 놓아 울면서 떠나갔다.|| ||<-2> 사무엘기 하권 13장 11-19절 || 당연히 이 계명을,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충분히 가능하고 결혼이 선택으로 취급 받는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기와 동시대에 살고있는 독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문화적 맥락을 전제하는 독서가 당연히 필요하다. 또한 신명기 22장의 이 규정은 여성의 본성을 질타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직 가해자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다. 남자는 형벌로서 은 50세켈을 지불해야 하고 속죄성 결혼으로 신부 선택권을 잃었으며 여자를 내보낼 권리도 빼앗겼다. 가부장제 사회였던 고대 근동에서 이처럼 남성의 권리를 제한한 문헌은 찾기 어렵다.[* 주원준, 같은 책, 346쪽] 비슷하게, 25장 11-12절을 보자.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11^^두 사람이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때리는 사람의 손에서 남편을 구해 내려고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치부를 붙잡을 경우, ^^12^^너희는 그 여자의 손을 잘라 버리고, 동정해서는 안 된다.||^^11^^두 남자가 싸울 때에,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12^^당신들은 그 여인의 손을 자르십시오.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2> 신명기 25장 11-12절 || 이 구절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우스운 느낌까지 준다. 그러나 신명기 25장은 5절부터 후손에 관한 규정을 나열하고 있으며, 특히 수숙혼{{{-2 嫂叔婚}}}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여 읽는다면, 그리고 후손이 끊기면 재산을 친척이 상속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중범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규정을 앞의 아홉째 계명의 풀이로서 '후손에 관한 규정'{{{-2 (5-10절)}}}의 연속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두 사람'이 싸우는 상황을 '두 형제'가 싸우는 상황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2 (11절)}}}. 그렇다면 이 규정은 두 형제가 싸우는데, 한 형제의 아내가 시숙의 성적 능력을 훼손하는 경우를 다룬 것이다. 상속 재산을 자신의 자녀에게만 물려주기 위해, 시숙의 성적 능력을 고의로 상실하게 한 여자는 손을 잘라버리고 동정할 가치도 없다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5-10절과 11-12절의 두 규정은 한 쌍을 이룬다. >---- >-주원준, 같은 책, 384쪽[* 같은 책에서 라삐들의 해석들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1.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의 성기를 만진 것 자체가 문제라는 해석 2. 상호 대등한 남자들 싸움에서 공정을 해친게 문제라는 해석(11절에는 남편이 싸움에서 밀린다는 묘사가 없다) 등이 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