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진당 (문단 편집) == 상세 == [include(틀:오자와 이치로)] [include(틀:일본의 자유주의 정당(호소카와 내각-노다 내각))] [[오자와 이치로]]가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일부), [[민사당]], [[일본신당]], [[자유개혁연합]], [[공명당]], 그리고 [[에다 사쓰키]] 등 기타 [[사회민주연합]], [[우파사회당]] 계열과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의 일부 구성원까지 한꺼번에 끌어모아서 만든 그야말로 당시 최대의 야당이었고, 존속 기간이 3년에 불과했만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 몰락 이후 비자민/비사회 계열 야당들이 집결한 정당이라는 특이한 점이 있다. 창당 직후 초대 대표는 [[가이후 도시키]] 전 수상이었지만, 사실상 오자와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오자와가 이렇게 상당수 야당 세력을 규합한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로 자민당을 '''1:1'''로 꺾고 정권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5년]]에 치를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도전장을 던졌는데, 이 선거에서 개선의석을 두 배 이상(19석→ 40석) 늘리며 총 56석으로 약진에 성공했다. 참고로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이끌던 일본사회당은 16석,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장대신이 이끌던 신당 사키가케는 3석으로 '''대폭망'''했고, 두 당과 [[대연정]]을 성사시키려던 자민당은 지난 참원선에 비해 46석으로 줄었지만 실질적으로 제1당을 유지했다. 이후 도시키가 대표에서 사직하고, 오자와가 [[1996년]] 초 당권을 잡고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제41회 중원선]]을 맡게 되었다.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처음 치르는 선거였는데, 그야말로 자민당과 '''1:1 드림매치(!)'''를 성사시킨 것이다. 신진당은 355명의 후보를 낸 자민당에 비해 6명 많은 361명의 후보를 내면서 자민당보다 후보를 많이 내는 기록을 갱신하나[* [[55년 체제]]가 성립한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보다 후보를 많이 낸 정당은 신진당이 사상 처음이었다.], 결과는 [[하시모토 류타로]]가 이끄는 '''자민당이 239석, 신진당이 156석'''[* 여야 전체로 보면 256(자민+사민+사키가케) vs 244(신진+구 민주+공산+제파+무소속)였는데, 결과 상으로 보나 의석 수를 까먹은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내각을 구성한 자유민주당의 승리였기에 이 정도 의석으로 정권 유지를 하기엔 충분했다.]으로 자민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자민당이 중의원 해산 직전 211석에서 28석을 더 불린 한편 신진당은 [[공명당]]이 합쳐진 점에서 [[창가학회]]의 선거 몰빵까지 받았는데도 [[중의원 해산]] 직전의 160석에서 '''오히려 4석이 깎이는 대참패'''를 했다. 이는 대연정으로 이탈한 구 사회당 지지층의 흡수에 실패했던 것이 그 요인으로 분석되며 때문에 구 사회당 지지층이 민주당이나 공산당으로 쏠리면서 결정적인 승부처라 할 수 있는 간토 지역에서 참패를 거두었다. 비록 구 사회당 지지층이 사회당에 실망하면서 이탈했지만, 애초에 신진당이 신보수주의에 가까운 노선을 따르고 있는지라 섣불리 지지하기에는 마음이 안 가던 상황이었는데 구 민주당이 창당되면서 표가 분산되었다는 것은 신진당에게 뼈 아픈 결과였다. 하지만 오자와는 선거 패배에 상관 없이 당 대표 직을 유지했고, 당 내에서는 분란이 커지게 된다. 오자와는 자민당과의 대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상술하듯 자민당이 과반에 연립 내각을 이루고 있는지라 아쉬워 할 상황이 아니었고, 이 때 [[1997년]] [[창가학회]] 세력[*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으로 옴진리교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자민당이 종교법인법 개정을 추진하자 창가학회 측이 반발했고, 이로 인해 창가학회의 이미지가 악화되면서 공명당계를 당직에서 배제하려는 오자와와 갈등을 빚었다.]이 탈당해 [[공명당]][* 정확히는 참의원 의원들의 여명클럽(黎明クラブ)과 중의원 의원들의 신당평화(新党平和), 그리고 독자 세력인 공명(公明)이 합쳐져서 1998년 재창당한 것으로, 공명당은 훗날 그 유명한 '''자민당과의 [[연립정부|연정]]'''을 구성하게 된다.]을 재창당한 것을 시작으로 다른 세력들도 줄줄이 탈당하여 오자와의 자유당,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으로의 복당]] 등 갖가지 고초를 겪은 끝에 신진당은 3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역사에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신진당의 주류 세력과 지지층의 대다수는 민주당으로 흡수되었고 오자와는 자유당이라는 군소 야당을 전전하다가 2003년 [[민주당(일본 1998년)|민주당]]에 합류한다. 1990년대 중반 당시의 웬만한 야당 세력을 하나로 모았기 때문에 非자민당, 非사회당계열의 일본 야당 인사들의 당적사에는 신진당이 꼭 들어가게 되어 있다. 신진당 소속이란 기록이 없는 야권 인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일본우정]] [[민영화]]에 반대하는 의미로 자민당에서 [[민주당(일본 1998년)|민주당]]으로 이적하는 케이스나 90년대 중반 이전 일본사회당 소속이었던 의원들, 1998년 이후로 정계에 입문한 신인 정도다. 물론 당시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의 [[민주당(일본 1996년)|구 민주당]]이 엄존했을 뿐더러, [[일본공산당]],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 출신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당초 구 민주당은 사회민주당 우파와 신당 사키카게가 연합해 창설된 당으로 나름대로 52석을 확보하는데, 1:1 매치를 부르짖은 신진당과는 달리 사회당 유권자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얻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