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식진 (문단 편집) == 중국계였나? == <예인수 묘지명>에 의하면 선조는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이라고 한다. 다만 <예군 묘지명>, <예소사 묘지명>, <예인수 묘지명>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확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예군, 예소사, 예인수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음을 밝히고 있으며 특히 예식진의 형 예군이 자신의 묘지명에 중화와 조상이 같으며, 영가의 난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해서 가문을 이루었다고 백제로 이주한 이유를 자세히 밝혔다. 또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양식의 형태를 띄는 점을 통해 볼 때 백제의 예씨가 정말로 《삼국지》의 그 예형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예씨가 중국계이거나 중국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무령왕]]이 최측근으로 중국계를 많이 기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무령왕은 왕릉도 남조식 벽돌무덤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남조와의 교류에 힘썼던 인물이다. 하지만 묘지명의 선조가 예형이라고 기록한 것은 숭조사업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대륙계 시조들은 대다수가 모화사상에 의한 숭조사업의 결과물로 날조된 것이고, 특히나 백제를 뒤통수치고 중국의 벼슬을 얻어 중국에서 살게된 예씨 집안에서는 필수적으로 해야 했던 일인 것이다. 후대의 고려 왕실은 숭조사업을 통해 왕건의 증조부를 당숙종 황제라고 날조했다가 원나라 학자들 한테 까인 적도 있었다. 고려를 세우고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왕건도 대륙계로 숭조사업을 하는 마당에 백제를 배신하고 당나라의 벼슬을 얻어 중국에서 살게 된 예씨 집안으로서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다만 예형이 황족이나 귀족의 신분을 가진자는 아니어서 숭조사업이 대상이 될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