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식진 (문단 편집) == 백제의 의문스러운 항복 ==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태자 융과 나머지 여러 성주가 모두 함께 보내졌다.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餘諸城主皆同送款 >---- >『舊唐書』 권83 蘇定方傳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 >其將禰植與義慈降 >---- >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 660년,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백제로 쳐들어와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겨간다. 당초에는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나당연합군은 고대국가의 전쟁형태인 영토점령 전쟁 스타일이 아닌, 철저히 백제국 멸망을 목적으로 한 전쟁(수도 사비직공) 을 치르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지방군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 [[황산벌]]의 초반부에서 [[의자왕]]이 [[계백]]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pds26.egloos.com/f0018015_517d149b29a29.jpg|width=10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pds25.egloos.com/f0018015_517d14a7a6f1c.jpg|width=100%]]}}} || || 의자왕의 당초 계획 || [[의자왕]]은 [[백제]]의 모든 지방군들을 동원하여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고 15만이라는 거대한 덩치를 그대로 아사시키는 전략을 위해 사비성을 빠르게 포기하고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평지에 있던 사비성은 수비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지에 있는 웅진성이 보다 수비에 용이했다. 게다가 백제 귀족들이 비록 왕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만큼 독자성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수백년간 달고 살아온 간판을 한 순간에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일례로 백제가 멸망한 뒤 지방의 귀족들과 잔존 왕족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신라에 완전히 합병된뒤에도 옛 백제지역의 "귀족" 유민들은 자신이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또한 나당 연합군과 손을 잡는 건 실리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신라와 당나라가 무리해서 지역 유지나 귀족들을 갈아치우진 않겠지만 당연히 백제 땅이 신라나 당나라의 영토가 되면 자신의 세력권인 백제귀족들은 그냥 촌뜨기 유지가 되는거기에 중앙정치에서의 영향력 등이 많이 상실될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리되었다. 의자왕이 백제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과 대립해서 갈등의 골이 커졌다고 한들, 서로의 피로 피를 씻어온 적국인 신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백제 안에서는 유력한 귀족으로 권력의 핵심과 가까운데 존재하지만, 신라에 항복하면 수많은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일 이후 백제 유력 귀족들은 신라에서 [[진골]]은 커녕 [[6두품]]으로도 못 들어가고, [[5두품]] 이하만 받았다. 이는 후에 신라 말기, 중앙정부에 반기를 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이런 모든 계산하에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겨 버티기 작전을 구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가설대로 백제군이 애초에 장기전을 노렸다면 성충의 간언대로 당군은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은 뒤 양군의 합류 자체를 저지한 뒤 시간을 끌었어야 한다. 하지만 백제는 당군이 금강 하구로 들어오고 신라가 황산벌에 이르기까지 피난 움직임은커녕 본격적인 전략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백제의 초기 대응은 완전히 실패였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난했다면 급박한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 위해 옮겨갔을 것이지, 처음부터 장기전을 노린다는 대국적 전략을 수행하려는 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일단 백제본기에 따르면 당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던 백제군 수천을 격퇴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기벌포가 금강 하류라고 해석한다면 합류지연을 노리고 요격하기는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보다는 요격 방식이 문제였다. 즉 1안은 당군이 상륙 자체를 못하게 막으면서 시간을 끌자는 안이었고, 2안은 당군을 백강 안으로 끌어들여 요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물러가게 한다는 안이었다. 그 중 2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은 당군의 수륙병진에 박살이 나서 기벌포의 방어선은 그대로 돌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군대를 긁어모아 야전에서 당군과 맞섰으나 대패했다. 즉 백제의 초기 방어 전략은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의자왕이 대국적인 전략을 위해서든, 급한 불을 끄기 위함이든 웅진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한 이상 곤란한 것은 나당연합군 쪽이었다. 웅진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비축된 물자도 있었고, 벼랑과 강으로 삼면에 둘러싸여 있어 군사적으로 제대로 공략 가능한 곳은 사실상 한 면 뿐인 천혜의 요새로서 아무리 대군을 몰고 닥돌해도 하루아침에 점령하기 힘들었다. 웅진성의 견고한 방어력은 아이러니하게도 200년 뒤 통일 신라의 대규모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에서 잘 드러난다. 이 때 김헌창의 장안국 군대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난공불락으로 꼽히는 [[삼년산성]]에서 방어전을 치르고도 순식간에 패배하는 등 '이렇게 못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졸전을 거듭했지만 웅진성에서는 신라 대군을 상대로 열흘 이상을 버텼다. 또 고구려라는 변수도 있다. 당이 요동을 건드리는 양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입장에선 바다를 건너온 당의 13만 대군을 그냥 두고보진 않았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동맹이라는 고구려가 뭔가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건 백제가 너무 빨리 항복해버려서 끼어들어 뭘 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고, 실제로 좀 늦었긴 해도 백제부흥운동과 맞물려 신라 북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으니 그것이 660년의 [[칠중성 전투]], 661년의 술천성 전투와 [[북한산성 전투]]였다. 이 전투들은 신라군의 주력이 백제 땅에 있는 것을 노려 방비가 허술해진 신라령 경기도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신라군이 백제부흥군 토벌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목적이 있었다. 다만 이 공격은 신라 측의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의 철벽수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남하한다면 나당연합군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특히 [[소정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건너 10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한 당의 입장에서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이상 고구려의 직접적인 참전뿐 아니라 고구려 수군(거기에 더해 백제 수군까지)에 의하여 해로가 위협받는다면 심각한 악재가 된다. 신라가 나당연합군 18만의 장기간의 보급을 제대로 대지 못한다면 당군은 적극적으로 끝장을 보려들기보단 적당한 선에서 협상하고 물러날 가능성도 높다.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백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 해도 큰 타격을 준 이상 일단 숨통은 확보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상황이 길어지면 땅을 신라에게 할양하고, 당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며 추후 고구려 공격시 도와준다는 약속을 하는 선에서 물러갈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던지 그동안 신라와 전쟁해서 얻어낸 땅이나, 추가적인 땅을 신라에게 잃을 것이며,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백제는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기에 이전과 같이 자주독립국의 형태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추후에 백제가 배신을 하고, 고구려의 협력을 통해 신라를 공격해 다시 되찾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다만.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게 한 것이 바로 2006년에 발견된 백제 웅진의 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