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식진 (문단 편집) == 반론과 재반론, 그리고 결론 == 하지만 상기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 우선 묘지명 어디에서도 의자왕에 대한 예식진의 반란 및 배신을 직접적으로 시사한 글은 찾기 어려우며, 단순히 '데리고 갔다'는 그 기록을 무조건 '생포해서 바쳤다'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이 있다. * 또한 '將'에는 '데리고 가다' 말고도 무려 21개의 뜻이 더 담겨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데리고 가다'보다는 '행하다(行)', '곁붙다(扶持)', '잇다(承)', '함께 하다(伴也)' 등의 해석이 적합하며, 이 경우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와 함께 와서(將) 항복했다"가 되어, 《신당서》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더불어(與) 항복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사서들에 예식진과 관련된 기록이 없으며, 《구당서》 <소정방 열전>의 기록도 "그 대장 예식. 그리고 우두머리 의자왕이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볼 수도 있기에 결함이 있다"라고 기술 되어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혹은 함께) 항복하였다.' 라는 기술은 《신당서》, 《구당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권83, <소정방 열전> "其大將祢植, 又將義慈來降" 《신당서》권111, <소(蘇)열전> "其將祢植與義慈降"]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예식(예식진)이라는 이름만 없지 '웅진방령이 함께 항복하였다'라는 기술이 존재한다.[* 《삼국사기》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18일조,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따라서 위의 《구당서》(<소정방 열전>)를 제외하고 예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다. 애초에 둘째 문단에서 《신당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구당서》를 분석하는 내용을 기술하면서 셋째 문단에서 《신당서》와 《구당서》 등 중국측 역사서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 다만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 예식이라는 인물과 묘비에 기록된 예식진이 동일인이라는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면서 예식진의 선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 기록된 묘지명이 발굴 되었으며 이 중에는 아들인 예소사(禰素士)와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있어서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그 중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서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친 걸 대놓고 적고 있다.''' 예인수 묘지명에서는 即引其王歸義于高宗皇帝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구당서》 및 《신당서》와는 달리 "引"을 쓰고 있다. 즉 대놓고 의자왕을 끌고가 당고종에게 바쳤다고 기술하고 있어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진 것. 때문에 '''예식진이 매국노임이 명확해졌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2731692|(111차 신라사학회 참고)]] 애초에 [[듣보잡|유명하지도 않던]] 적장 한 명을 (요새로 피신한) 적의 왕보다 앞에 기록한다는 것부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한 반론에서 말하듯 의자왕과 단순히 더불어(與) 항복했더라면, 예식진이 당나라 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공적이 있어야 벼슬을 받는다.''' 당나라 대장군이 단순히 항복했다고 주는 지위가 아니다. 예식진이 벼슬을 받을 만큼의 공로를 세웠다면 가능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