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춘추전국시대) (문단 편집) === [[춘추시대]] === 이때만 해도 [[정나라]](鄭),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宋)와 함께 큰 세력이었지만 후에 [[제나라]](齊), [[진(희성)|진나라]](晉),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宋), [[노나라]](魯) 등의 압박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공자들 간의 자리 다툼으로 쇠퇴했는데[* 사실 무공도 자신의 형 공백을 죽이고 즉위했다.] 장공이 죽은 후 장공의 서자 주우가 자신의 이복 동생 환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충신]] 석작 등의 수습[* 석작은 주우를 죽이고, 주우가 군주가 되는 데 공을 세운 아들 석후도 죽였는데, 이것은 '대의(나라)를 위해 친족도 죽인다'라는 뜻의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유래가 되었다.]으로 환공의 또 다른 이복 동생 선공을 세워서 내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공은 색골이라서 자신의 계모였던 위 장공의 첩 이강을 범하고 아들 급자(急子)를 낳았다.[* 참고로 얼마나 급하게 낳았는지 이름이 급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또 급자에게 시집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제나라 희공의 딸 [[선강]]을 [[스틸]]하고 수(壽)와 삭(朔)이라는 아들을 낳고 선강을 총애하자 선강과 삭은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도 수를 태자로 삼기 위해 원래 태자였던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선공은 급자를 다른 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리 도적들을 매수해 사신이라는 표시를 보면 죽이라고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수가 급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신의 상징인 백모(白毛)[* 얼룩소의 꼬리털로 만든다.]를 가지고 먼저 떠났고 수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알고 통곡한 급자는 스스로 자신이 목표라는 것을 도적들에게 밝혔고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선공은 [[화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수의 동복 동생인 삭이 뒤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혜공은 사악해서 평소 급자와 수를 모함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위 선공의 재위 기간 19년을 고려해 보면 선공이 즉위한 후에 태어난 혜공은 즉위했을 때 미처 20세도 되지 못했다. 즉 10대에 이미 형들을 헐뜯고 다닌 것.] 이에 급자의 동생 검모는 우공자 직 등의 협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혜공의 외숙부뻘이었던 제나라 양공은 그를 지원해 검모를 몰아내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은 돌아와 우공자 직 등은 죽였지만 정작 검모는 주나라로 추방시키는 걸로 끝냈는데 그가 주왕의 [[부마]]였기 때문이었다. 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이 즉위하니 그가 [[위의공|의공]]이다. 의공은 [[학]][[덕후]]질을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본인도 적족의 침공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의공의 신하 굉연(宏演)이 시신이나마 수습했으나, 칼로 엄청 썰려서 [[간]](肝) 외에는 고깃 덩어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굉연은 그 간을 향해 절을 한 뒤, 주공의 시신을 장사지낼 관과 기구가 없으나, 자신의 몸으로 관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배를 가른 다음 자신의 배 안에 간을 넣고 목숨을 끊었다. 이를 두고 부복납간(剖腹納肝)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라가 멸망할 뻔 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했고 수도를 폐허가 된 조가에서 초구로 옮겼다. 의공의 아들 개방은 제나라로 망명해서 나중에 제나라 간신이 되어 역아, 수조와 함께 환공을 악의 길로 빠뜨리고 뒤를 이은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소공을 즉위시키는 등 제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위나라 입장을 보면 문제는 개방이 이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혜공의 후대가 남아 있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혜공과 정신나간 의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비운의 태자였던 급자의 후손을 찾았지만 급자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수의 아들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검모의 동생 소백 석의 장남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 소백은 제 양공의 주선 하에 계모였던 선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보았다.] 하지만 대공은 몸이 약해 곧 죽었고 그의 아우 훼를 세우니 그가 문공이다. 문공은 우수한 임금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진력했고 이렇게 위나라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문화는 흥성하였지만 문공이 진(晉)나라 떠돌이 공자 중이를 푸대접했다가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군주가 되자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계속 몰락했고 강국인 제(齊), 위(魏) 사이에 끼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위나라 출공과 장공(이름은 괴외) 부자(장공이 출공의 아버지)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괴외가 세자 시절 어머니 남자(南子)(...)[* [[남자]](男子)가 아니다! 남자는 송나라 공녀, 즉 거슬러올라가면 옛 상나라 왕실의 후예로 '자'는 성을 의미한다. 남은 시호이며 결국 자성이다.]가 음탕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자 죽이려고 하다가 뽀록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괴외의 아버지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출공이 임금이 되었으나, 괴외가 다시 돌아와서 출공을 몰아내고 장공이 되었다. 그러나 장공이 쫓겨나고 제나라와 진나라의 입김을 받아 공자 반사와 공자 기라는 위나라 공족들이 차례로 임금이 됐다 쫓겨나는 혼란이 반복되었다. 겨우 위나라 내부의 움직임으로 출공이 복위하여 안정되나 싶더니 출공이 자기를 불러다 임금으로 삼은 신하를 쫓아냈다가 역관광을 당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