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춘추전국시대) (문단 편집) === [[전국시대]] === 전국시대에 이르러 위(衛)나라는 [[위(전국시대)|위(魏)나라]]의 종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위혜왕]]이 칭왕한 뒤에는 아예 성후를 폐위하여 그의 신하였던 자남 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 조상 공자 영은 영공의 서자로 문공의 7세손이다. 위에서 장공이 달아나 위나라에 세자가 없을 때 위 영공과 남자에게서 모두 영공의 뒤를 이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받지 않고 출공을 세우도록 권하고 자신은 고사했다.]을 후작으로 책봉했는데 그가 평후이다. 이에 성후 이후부터는 더이상 선대의 군주를 공(公)으로 높이지 않게 되었다. 기원전 330년에 위(魏)나라는 위(衛)나라를 아예 합병해버렸다. 당시 평후의 아들이 후작을 잇고 있었는데 그에게 복양(濮陽) 일대만을 식읍으로 남겨주었고, 이에 위(衛)나라 종실의 명맥은 일개 식읍의 주인인 '위군(衛君)'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본래 군(君)이란 읍(邑)의 주인을 지칭하는 말로, 여기에서 우리말 "임금"과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춘추시대 이전까지는 이른바 [[오등작]]으로 일컬어지는 다른 칭호들을 보유한 경우에는 보통 그 칭호로 부르긴 했으나, 《[[논어]]》의 〈자로〉 3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위군(衛君)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당시 제후로 칭해지던 군주들을 가리켜 군으로 지칭하는 것이 딱히 격을 낮춰 부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국시대 때는 사정이 달라지는데, 기존의 제후들이 왕을 자칭하고서는 스스로 '후(侯)'를 책봉하게 되면서, 군(君)은 정식으로 책봉되지 않은 식읍 소유자들을 한정해서 부르는 칭호로 격이 낮아졌다. 즉 위성후 때부터 공식적으로 '후'로 칭해진 것은, 위(衛)나라가 위(魏)나라 왕의 책봉을 받는 속국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군(君)으로 격하된 것은 아예 나라 자체를 뺏겼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후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위(魏)나라가 [[진(통일왕조)|진(秦)]]나라에 합병되어 버렸고, 진나라는 복양에 동군(東郡)의 치소와 현(縣)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위군의 식읍을 야왕(野王)으로 옮겨두었다. 진나라가 군현제를 실시하고 있던 것에 비춰, 진나라가 기존에 있던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진나라는 귀족들의 영지에 해당되는 '읍(邑)'의 상위 단계로 현(縣)을 설치하고 현령(현장)을 왕의 대리인 신분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하게 하여, 기존 귀족들의 통치권한을 제한해둔 것에 가까웠다. 오히려 진나라는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식읍을 수여하여 그 공적을 표창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기존 6국에 있던 식읍들도 함부로 몰수하여 직할령으로 만들지는 않았는데,[* 때문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기존 6국의 부활을 지지하는 유력자들이 나타나 진나라가 급속도로 붕괴되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6국의 직계 왕족들은 대체로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에 위군(衛君)은 이미 일개 식읍의 주인으로 격이 낮아져 있었기에 오히려 기존의 권리를 계속 보장받게 된 운명의 반전이 일어났다. --인생사 새옹지마-- 이를 두고 진나라가 위(衛)나라를 특별히 취급하여 명맥을 잇게 했다느니, [[시황제]]가 실제로는 전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는(...) 등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진나라의 군현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발생한 오해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