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춘추전국시대) (문단 편집) === 뒷이야기 === [[무제(전한)|한무제]] 때에 이르러 종래 [[한나라]]의 통치철학인 황로학(黃老學)[* 법가를 통치철학으로 도입한 [[진(영성)|진나라]]가 결국 실패하자 진나라 말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도가]]의 일파인데,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정통 도가라기보다는 [[제자백가]]의 주요 논리들을 도가 이론을 중심고리로 짬뽕시켜 놓은 것에 가까웠다. 사실 황로학 이후로 한나라가 도입한 유학 역시 기존의 정통 유학을 직접 계승한 것이라기 보다는, 황로학의 중심 논리를 유가 이론으로 수정해놓고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형태로 변질된 것에 가깝다.]을 대체하고자 [[유학(학문)|유학]]을 도입해보는 시험이 진행되었는데, 이에 [[주나라]] 왕실의 후예를 예우하자는 유학자들의 청원에 따라, 기원전 114년에 희가(姬嘉)라는 인물을 주나라 왕실의 후예로 공인하여 식읍을 수여하고 관내후 격으로 예우했다. 희가가 받은 작위는 주'''자남'''군(周子南君)이었고, 그 지위를 대를 이어 세습했다. 이후 유학에 심취해있던 [[원제(전한)|원제]]가 즉위하자 유학자들은 주자남군의 지위를 격상해야한다는 여론을 펼쳤고, 결국 기원전 44년에는 주승휴후(周承休侯)로 개봉(改封)되어 제후왕의 바로 아래 서열로 높였다. 유학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나라가 [[하나라]]와 [[상나라|은나라]]의 후예를 책봉하고 빈객으로 예우한 예에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이를 [[이왕삼각]]론이라고 한다. 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유학이 한나라의 통치철학의 지위를 확고히 한 상황이었기에, 결국 기원전 8년에는 후에서 공으로 격상되어 천자의 빈객으로서 제후왕보다 높은 예우를 받게 되었다.[* 별도로 [[공자]]의 후손인 공길(孔吉)을 은소가후(殷紹嘉侯)로 책봉했는데 공자가 상나라 왕실의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후일 송공(宋公)으로 격상되었다.] [[왕망]]이 정권을 장악한 기원후 4년에는 정공(鄭公)으로, [[신나라]]가 세워지자 장모공(章牟公)으로 전봉(轉封)되었다가, 신나라가 멸망하자 도로 주승휴공으로 복구되었다. 후한 때인 37년에 '''위'''공(衛公)으로 전봉되었고, 왕조들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위공에 대한 예우는 [[영가의 난]]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한서]]의 주석가인 신찬(臣瓚)은 '작호에 자남이 들어가니 희가는 위나라의 공자 자남미모(子南彌牟)의 후손이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나중에 (자남씨가 국성인) 위나라를 봉호로 쓴 걸 보면 자남씨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희가는 [[서얼|얼자(孼子)]]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대략적인 가계조차 사서에 언급되지 않고 있어, 단정하긴 무리라고 보는 의견이 대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